아들에게-5
긴 연휴의 마지막 날, 양구에서 대구로 돌아와 한바탕 빨래와의 전쟁을 하고 나니 벌써 늦은 밤이 되었네. 너와 봄이를 재우고 남은 짐정리를 마친 뒤, 오늘의 기분을 꼭 남기고 싶어 노트북 앞에 앉았어.
사랑아, 네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지 이제 딱 1년이 되었구나.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연습경기를 했고, 대회에도 나갔지만 이번 대회는 정말 특별했어. 우선 친구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경기를 시작할 때 늘 후보 선수로 대기석에 있던 네가, 주전으로 친구들과 함께 경기를 시작했던 대회였다는 점에서 특별했지. 하지만 그보다 더 특별했던 건 지난 대회를 끝낸 후 축구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네가 너의 최선을, 아니 그 이상을 해낸 경기였다는 거야.
너의 축구 경기를 쫓아다니며, 오랫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네가 팀에서 네 몫을 다하는 선수가 아닌 것 같아서였어. 늦게 시작한 것도 맞고,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팀에서 네 역할을 제대로 다 하는 선수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했어.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엄마는 조금 초조했던 것 같아. 축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다 보니 더 그랬어. 네가 교체 선수로 경기장에 들어갈 때면, 혹여나 너의 실수로 팀이 패배할까 봐 두려웠어.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되더라.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넌 얼마나 두려웠을까?‘ 싶어. 경기장 밖의 엄마도 그렇게 초조했는데, 넌 어땠을까? 네가 공을 잘못 패스해서, 네 슈팅이 약해서, 네가 네 자리에서 할 몫을 다하지 못해서 골을 먹히고, 팀이 경기에서 질까 봐 얼마나 겁이 났을까? 그 두려움을 안고도 폭우를 견디고, 더위와 추위를 견뎠을 너를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저리다.
지난번 대회를 끝으로 축구를 그만두려고 했던 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매일 혼자 개인 훈련까지 해가며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모습에 엄마는 좀 놀랐어. 넌 이제 겨우 9살이고, 뭐든 쉽게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네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축구는 지나가는 이벤트에 불과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다시 해보겠다고 했고, 정말로 잘 해냈지.
이번 양구 대회는 여러 모로 엄마에게도 도전이었어. 혼자 운전을 하고 가기에 너무나 먼 길이었고, 연휴 끝이라 대회에서 돌아오면 바로 출근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지. 거기다 봄이까지 함께 가게 되었고. 그래도 네가 열심히 하는데, 엄마가 주춤거릴 수는 없으니 기쁘게 짐을 꾸렸어. 이왕 가는 거,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오자 마음먹고는, 다른 친구들보다 하루 먼저 올라가 춘천을 여행하는 대범한(?) 일정까지 짰지. (결과적으로는 참 좋았는데, 과정은 쉽지 않았단다.)
강원도도 낯선데, 양구라니. 그 멀고 낯선 곳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치른 2박 3일의 대회. 이 대회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어.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엄마는 그래. 넘치게 많은 것을 담아 왔어.
다시 가기 어려운 곳에 너와 봄이와 함께 갔다는 것만으로도 큰 것을 얻은 기분이지만, 네가 처음으로 네 몫을 해낸 대회였다는 점에서 엄마는 너를 계속해서 지지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왔어. 아마도 넌 무한한 자신감을 얻어 왔겠지? 친구들과 코치님에게 받은 인정도 너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거야.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스스로를 인정하는 마음 그게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사랑아, 살다 보면 애써도 안 되는 일들이 참 많아. 노력해서 되는 일보다, 노력하는 데도 안 되는 일들이 정말로 많지. 그럴 때마다 이걸 계속하는 것이 맞을까, 여기서 포기하는 것이 맞을까, 숱한 고민을 하게 돼. 어떤 선택을 하든 아쉬움은 남겠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와. 그 선택이 계속하는 것이든 포기하는 것이든, 선택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지. 그 용기는 결국에는 끝까지 해본 마음에서 나온다고 믿어. 나의 최선을 내가 다 해보는 것. 나 스스로 '이만하면 진짜 끝까지 해봤다'며 다독일 수 있는 것. 그렇다면 비록 노력의 끝이 포기여도 그건 마냥 슬퍼할 일이 아니야. 그 포기는 또 다른 시작과 선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테니까.
엄마는 네가 쉽게 포기하고 쉽게 주저앉는 사람이 아니길 바라. 무엇이든 시작을 했다면 끝까지 해보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지난 대회를 끝내고 더는 노력할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만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속상했던 이유야. 네가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 같았거든. 어찌 되었든 끝내 네가 그 고비를 넘기고 스스로 노력한 결과, 이번 대회에서 결실을 본 것 같아 엄마는 너무나 값지고 기꺼웠단다.
앞으로 너는 수많은 것들에 도전하고 그것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잘되는 일보다 잘 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을 배워갈 거야. 도전과 노력, 실패와 좌절 사이에 가끔 성공과 성취가 따르기도 할 테고. 그것이 삶이니까. 마흔이 조금 넘은 엄마도 셀 수 없이 많은 것에 도전하고 애써왔지만, 그동안 이룬 것은 손에 꼽는단다. 그래도 그 손에 꼽을 만한 성공과 성취는 모두 숱한 도전과 애씀에서, 그러다 실패하고 좌절한 경험에서 피어난 꽃이었어. 그러니 애쓰고 또 애쓰렴. 실패해도 괜찮으니. 엄마가 장담하건대, 실패로만 남는 애씀은 없어. 사실 실패라는 단어도 적절하지 않아. 애씀이 곧 배움이니까.
엄마는 네가 나아갈 길이 기대돼. 축구는 네가 나아가는 길에 만난 작은 문 하나일 뿐이야. 이 문을 넘어가다 보면 또 어떤 문을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엄마는 네가 마주할 문이 어떤 문이든, 너 스스로 그 문을 여는 용기와 문 안에서 펼쳐질 기쁨과 슬픔을 애쓰며 겪어낼 단단함이 네 안에 자리 잡기를 바라. 엄마는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있을게. 혼자가 두렵다면 언제든 엄마에게 손 내밀어도 괜찮아. 엄마가 지금처럼 너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 네 뒤를 지킬 테니.
사랑아, 너무 고생했어. 정말로 수고했어.
기특하고 대견한 아들. 오늘은 꿈도 꾸지 말고 푹 자렴.
너의 내일을 다시금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