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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도 계속되는 아침 산책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마다 걷는 내가 대견해

한동안 이동하느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아침 산책을 스페인 베날마데나에 온 이후로 다시 시작했다.


테라스에서 해변 산책로가 살짝 보이는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얼른 나가 저 사이에 섞여 걷고 싶어 진다. 남편이랑 꼭 붙어 다니기로 약속했지만 나는 일어났는데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거나, 일이 바빠 당장 나갈 수 없을 때 굳이 기다리기보단 혼자 나가 한 바퀴 휙 돌고 오는 게 서로에게 낫다는 걸 함께 여행한 지 4년 만에 둘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물론 이곳이 그만큼 안전하니 가능한 일이지만. 어쨌든 요즘은 8시 반이면 해가 다 올라오니 8시가 되면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한다.


준비물은 블루투스 이어폰, 작은 생수병, 와이파이 라우터, 핸드폰과 현관 열쇠. 숙소 입구는 열쇠로, 리조트 입구는 카드키로 열어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 은근히 번거롭다. 나도 운동할 때 뒤로 메는 작은 가방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리조트 담을 따라 쭉 내려오면 도로를 따라 양 옆으로 해변이 길게 펼쳐진다. 항상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고민하지만 해가 뜨는 왼쪽으로 향할 때가 많다. 바다에 비치는 햇살이 아름답기도 하고, 해를 등지고 돌아오는 길이면 뒤가 뜨끈해져서 하루치 광합성은 다 한 느낌이랄까. 오른쪽과 달리 왼쪽은 레스토랑이 산책로 바깥쪽에 줄지어 있어서 걷는 동안 온전히 바다만 눈에 담을 수 있어서 사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왼쪽으로 꺾는다. 




오전에 비가 올 거라더니 아직은 흐리기만 하다. 오히려 이대로 비 없이 구름이 걷히고 맑아질 것 같기도. 제주 바다를 보며 살 때도 많이 느낀 거지만 바다는 날씨에 따라 색이 천차만별이라 매일매일 다르다. 흐린 날보다 맑은 날의 바다가 더 아름답기는 해도 회색빛 바다 또한 나름의 운치가 있고 무엇보다 눈이 편해서 걷는데 부담이 없다. 




전에는 아침 산책보다 함께 하는 밤 산책을 더 좋아했다. 규칙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들고, 씻지 않고 나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산책 나가려고 머리 감고 샤워하는 건 더 이상하니 아침 시간대에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가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낮보다 한결 조용해진 밤 시간이 주는 평온함 아래 가까운 이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느긋하게 거니는 순간을 좋아했다. 


그러다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답답한 마음에 좀 걸어보려고 나갔다 온 아침 산책이 계기가 되어 조금씩 횟수가 늘어나고 이제는 일주일에 3-4번 이상 아침에 산책하러 나간다. 남편과는 오후나 저녁시간을 이용해 함께 하는 산책을 즐기고 아침은 어쩌다 한두 번 동행할 때를 제외하면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감지 않은 내 머리만 쳐다볼 것 같아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었고 일주일쯤 지나니 땀이 나 도저히 후드를 쓴 채로 버틸 수가 없어 벗어버렸는데 집으로 오는 동안 아무도 내 머리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옷 또한 너무 달라붙는 옷을 입는 것이 민망해서 레깅스 대신 펄럭이는 와이드 팬츠를 입고 걷다가 스페인에 와서 다들 자유롭게 입고 다니는 모습에 용기를 얻어 레깅스에 바람막이 걸치고 신나게 걸어 다니고 있다.



제주에선 집 근처 작은 공원을 한없이 돌며 걸었다면 스페인 베날마데나에서는 해변을 따라 한번 쭉 걷고 오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많은 거리를 걷는다. 많이라고 하니 엄청 먼 거리를 걷고 오는 것 같지만 막상 다 걷고 집에 오면 한 4km, 대략 6천 보 정도 된다.


처음엔 산책을 시작했을 땐 일찍 지치는 날이나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3천 보 언저리로 겨우 걸은 날이면 은근하게 자책을 했다. 적게 걸은 날은 적게 걸어서, 오래 걸은 날은 빠르게 걷지 않아서, 빠르게 오래 걸은 날은 뛰지 않아서. 산책을 시작하고 스스로에게 얼마나 자주 트집을 잡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거기서 당장 눈에 보이는 수치를 위해 나를 압박하면 수차례 그래 왔듯 금방 포기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어 '아침 산책만큼은 얼마를 걷든 절대 뭐라고 하지 말자, 그냥 걷고 싶은 만큼 걷자'라고 다짐했고 매일 걷고 나면 아낌없이 호탕하게 셀프 칭찬을 날렸더니 이제는 아침이 기다려진다.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걷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피곤해서 더 자고 싶은 날이면 자책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오늘 놓친 아침 모습을 그리워하게 될 거란 걸. 그런 점에서 한 달 살기는 좋은 원동력이 돼준다. 한 달 뒤면 난 여기에 없을 테니까. 내가 이곳의 아침을 볼 수 있는 날은 정해져 있으니까.





스페인 남부는 날씨가 따뜻하고 해변이 많아서 유럽 각지에서 휴양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인지 시간 상관없이 산책로를 걷거나 달리는 사람이 늘 많았다. 부부, 형제, 자매, 친구사이 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볼 때면 어쩐지 흐뭇해지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와 같이 산책한다는 건 아무래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그만큼 가깝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회사 사람들과 같이 점심 먹고 소화시킬 겸 회사 근처 한 바퀴 걷는 산책이 아닌 이상 대체로 산책은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함께 적당한 속도로 걸으려면 그만한 시간을 같이 쓸만한 상대여야 하니 격식을 차려야 하는 만남에 산책을 더한다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산책하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혼자 하는 산책은 나에게 내어주는 시간이라면 함께 하는 산책은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시간을 내어주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단순한 걷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매일 걷는 길에 좀 익숙해진 뒤로는 산책로 끝까지 걸어갔다가 해변으로 내려와 모래사장을 밟으며 돌아온다. 새벽녘부터 빠진 바닷물 덕에 단단해진 모래사장은 걷기에 더없이 좋은 상태가 되고 시원한 파도소리에 걷는 동안 생각으로 엉킨 머리와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오늘도 나오길 잘했다. 오늘도 걷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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