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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ra Sep 15. 2019

31 : 딱풀

연애 에세이 :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언제인가요 ?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31 : 딱풀      

연애 에세이 :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언제인가요 ?


         


 언제가 가장 즐거웠냐는 물음. 언제가 가장 행복했냐는 물음.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위해 추억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저절로 번져오는 웃음이 ‘언제’라고 말해주면 ‘왜’하고 되돌아오는 물음. 이유를 찾다 그만둔다. 이유가 없는 것이 이유라서. 살면서 가끔 받는 질문들이다. 예전에는 이유를 찾았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즐거웠다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2박 3일. 제주도는 다녀온 적이 있기에 그와 간다고 특별할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역시나 그리 많이 웃지도 그리 많이 떠들지도 그리도 벌 거 없는 여행이었다. 우리는 먹고 구경 하고 쉬고, 먹고 구경 하고 쉬고, 먹고 또 구경 하고 쉬었다. 시간에 쫓겨 억지로 다니지 않았고 시간이 차오르면 숙소로 돌아왔다. 제주도의 풍경보다는 숙소에 있는 안락함이 더 즐거웠다. 은은하게 빛나는 하늘 아래 새까만 바다와 살짝 불어오는 바람과 맥주와 소주, 간식과 회를 즐기며 함께한 시간이었다. 평온하고 평범했다.     


 평범함.     


 기대하지 않았는데 신기하리만치 유독 좋았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라는 특별함이 없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가끔 생각해봤지만,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후 그에게 물었다. 제주도에서 언제가 가장 좋았냐고. 그는 ‘너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워있었을 때’하고 답했다. ‘왜’ 하고 묻자 그는 ‘몰라’ 하고 답했다. 이유가 없다는데 생각해보라며 다시 물었다. 생각에 잠긴 그는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음. 커다란 지구 안에서 너랑 나랑 만난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 그 무수히 빛나는 별 아래에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것도 신기했어.’ 특별해지는 듯한 그의 말에 기뻤지만, 그러다 잠시, 알 수 없는 감정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유를 묻지 말걸. 굳이 의미를 두게 하지 말걸.     


 결과에는 원인이 있듯이 느꼈던 감정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를 찾는 것이 때로는 의미 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즐거움, 기쁨, 행복, 슬픔, 아픔, 외로움들은 사람의 감정 안에서 태어나는 것들이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채울 때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 이번 제주도 여행이 그런 듯했다. 이유 없이 좋았던 날들.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들에 이유를 붙여 의미를 부여한 적이 많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었던 여행.     


 나는 무엇을 하든 그만한 이유를 달고 살았었다. 버스를 타야 하는 이유, 터덜터덜 걸어가야 하는 이유, 밤늦게 친구를 부르고 싶은 이유, 맥주 한 캔 먹을 돈이 떨어진 이유, 야근을 해야 하는 이유, 아무도 없는 불 꺼진 방 안에 홀로 있어야 하는 이유. 수많은 이유들이 꼭 어깨에 짊어진 짐 같아 보였다. 덕지덕지 붙은 이유들. 만들지 않아도 될 이유들을 만들어가며 살았던 날들. 여행을 가는 이유도 현실을 떠나고 싶어서 일 때가 많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 여행조차도 이유가 붙어 있었다. 갑갑해지는 느낌. 이 때문에 내가 그에게 이유를 물었던 것을 후회했었나 보다.     


 그와의 제주도 여행. 특별할 것이 없어서 평범했던. 오히려 이유가 있어 좋았던 날들 보다 이유가 없어 좋았던 그 날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함의 편안함 때문이지 않을까.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떠난 여행에서 아무런 이유를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안함이 살아가는 날들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도 평범했기에 특별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유' 속에 살아갑니다. 
당연하게도 이유 없는 결과는 없겠지만,
그 이유로 인해 삶의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죠
가끔은 놓아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친구를 만나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걸어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영화를 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셔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늘을 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언가 해보세요.
가끔은 아무생각도 하지 않도록 노력해보세요.
나를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면
삶이 조금 더 여유로워질거에요.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출간된 에세이 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토대로 자아와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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