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N년차 정신병자입니다
“오, 세상에.”
이것이 내가 의사 선생님 앞에서 뱉은 첫마디였고,
“대박.”
정신을 차려보니 두 번째 대화도 이런 식으로 끝맺었다. 예의 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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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심각하네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은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괜히 움찔거렸다. 모든 것이 내 죄로 느껴졌다. 사실 누군가의 죄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지만, 내가 이런 성향이 아니었다면 병을 이 정도까지 키우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자괴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멍한 정신인 채로 병원 문을 나섰다. 중간, 기말고사의 시험지보다도 열렬하게 쳐다봤는데, 내 처방전의 글자들이 배열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항불안제', 'ADHD 치료제', '정신신경용제' 등... 이상이 내가 먹어야 할 약들이었다. 사람이 너무 긴장하면 모든 게 새하얗게 보인다던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약의 개수는 세어 볼 수 있었다. 챙겨 먹는 영양제보다도 수가 많은 약의 종류가 두둑이 약 봉투에 담겨 나오자 그제야 나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정신병자구나.'
요즘은 정신병도 유행한다는 말이 돌던데, 아무래도 나는 트렌드 세터였던 것 같다.
사실 트렌드세터네, 뭐네 하는 말로 애써 나를 위로해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하루치의 약은 계속 늘어만 갔고, 약을 아무리 먹어도 내 상태가 호전될 기미는 없었다. 성질 급한 나는 약만 먹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변하는 게 없으니 버려지는 시간들에서 불안의 싹이 점점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정말 안 될 인간이었던 걸까?
내가 정신병자라는 선고를 인정하고 나서 생긴 변화는 나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가혹했다. '혹시 내가 인간으로서 실패한 존재는 아닌가',라는 의문은 나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그것도 매우 쉽고도 잔혹하게. 단순히 내 성향과 단점이라 생각했던 요소들이 사실은 병으로 인한 증상이었다니… 사실 나라는 존재는 없고 병이 내 몸을 숙주 삼아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도 덜컥 공포감이 들러붙었다.
평소라면 ‘에휴, 내가 그럼 그렇지~ 하하!’ 하고 넘겼을 일에도 쉽사리 자책했고, 내가 나름 장점이라 내세우던 둔감한 성향마저도 끝끝내 살얼음 같은 잣대를 쥐고 나에게 실패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도, 목숨이 위태롭다는 적신호가 뇌내를 가득 메웠다. 이런 공포감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사회에 내던져진다면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뚜껑 열린 물티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말라갈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입 밖으로 내놓은 첫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