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는 지금의 에픽하이 한 장 요약
에픽하이의 [신발장] 앨범이 발매된 지 10년이 되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겪었지만 에픽하이는 올해도 새 앨범을 내고 해외 투어를 돌고 연말 콘서트 포스터에서 온몸으로 망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나는 올해 콘서트 티켓을 사며 카드값과 통장 잔고를 쳐다보고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졌다.
이 앨범의 10주년을 기억해볼 이유는 에픽하이에게도 꽤 크다. 바로 당신이 아는 지금의 에픽하이가 확립된 앨범이 [신발장]이기 때문이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l99qybJUiyOtdQWLQXDzQfAaqq-CjTZTE&si=baCnxOmOd3NO8pIi
30~40대, 중견 뮤지션 에픽하이는 [신발장] 앨범으로 시작하고 확립됐다. [신발장] 앨범은 20대 시절 꿈과 이상을 향해 돌진하고 온갖 분야에 도전하던 에너제틱한 청년에서, 잘 다듬어진 음악과 단단한 세계관을 가진 중견 뮤지션으로 변모한 에픽하이의 모습을 각국 청중들에게 대대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부르즈 할리파' 등을 제외하면 수록곡 대부분의 사운드에서 발매 년도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커리어 전체를 관통하는 둔탁한 질감의 드럼 위에 마이너 코드 기반의 멜로디를 올려 짙은 서정성을 선보이는 구성이 어떤 트렌드보다는 에픽하이의 여러 전작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전작으로는 [Remapping the Human Soul] 이 대표적이지만, [e]의 첫 번째 CD “[e]motion”이나 [LOVESCREAM] 소품집처럼 어쿠스틱 세션과 멜로디를 부각시키는 구성으로 서정성을 내세웠던 과거 발매작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허나 기시감과는 별개로 [신발장]과 완벽하게 겹치는 포지션의 앨범은 에픽하이 디스코그래피에 존재하지 않는다. [Remapping the Human Soul]까지의 음악보다는 랩과 사운드가 모두 순응적인 뉘앙스를 띄고, “[e]motion”, [LOVESCREAM]보다는 드럼과 가사가 무겁다. 댄서블하지 않은 느린 템포의 곡이 타이틀곡으로 선정된 것도 1집 이후 [신발장]의 ‘헤픈엔딩'과 ‘스포일러'가 처음이다. (’우산', ‘트로트', ‘춥다'는 공식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이처럼 여러 전작의 특징을 가져와 모아 둔 듯한 앨범의 수록곡은 그룹 에픽하이가 잘하는 것과 앞으로 내세우고 싶은 것을 요약 정리해 다수 청중을 설득하는 효과를 냈다.
극도로 절제된 사운드와 연출을 통해 서정성을 보여주는 구성은 30대 중견 뮤지션으로 포지션을 바꿔야 했던 에픽하이의 상황에 부응하여 시너지 효과를 냈다. 타진요 사건과 [열꽃] 이후 청중은 에픽하이가 큰 고난 이후 자기 주도권을 명확히 잡고 살아가는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있던 것 같다. 7집 [99]에 대한 반응이 ‘춥다'의 흥행과 ‘UP’을 향한 비난으로 요약되고, ‘UP’에 충격 받은 이들이 에픽하이가 YG 주도적 음악을 하기 시작했냐는 의구심을 표출했던 것을 보면 그렇다. 다른 멤버들이 군대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들의 소속사 YG 등지에서 2세대 아이돌 그룹과 90년대생 힙합 뮤지션이 대거 등장하며 과거 에픽하이가 표상하던 에너제틱한 청년의 자리를 가져가게 된 시장 상황도 이들의 변화를 요구했다. 이 상황에서 서정과 성숙을 겨냥한 [신발장]의 전회는 [99]에 대한 소위 ‘불호 피드백'을 완벽히 반영한 결과로서 어른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서정성을 내세웠던 더블 타이틀곡 ‘헤픈엔딩'과 ‘스포일러'가 이들에 대한 기대치를 정확하게 충족하는 방향의 곡들이었다면, ‘Born Hater’의 대흥행은 이들을 보다 큰 스케일의 투어를 여는 힙합 스타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줬다.
2014년 당시는 한국 음원차트에 사상 최초로 욕설이 섞이고 보컬 피쳐링이 없는 19금 힙합 트랙이 마구 올라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쇼미더머니 3’가 10~20대 사회를 뒤흔들며 가능해진, 당시까지의 힙합 팬들에게는 무척 생경한 풍경이었다. 그 에픽하이도 2000년대엔 욕설 섞인 가사로 방송금지 검열과 싸우는 동시에 방송 활동용 곡에서는 표현 수위를 자제하고 보컬 피쳐링을 기용하며 팝에 가까운 터치를 적극 가미했는데, 그들이 그렸을 법한 미래가 뜻밖의 계기로 도래해버린 것이다.
https://youtu.be/3s1jaFDrp5M?si=3lofO6dgqjgZeGij
‘Born Hater’는 기존 힙합 씬과 힙합 아이돌을 막론하고 그 해의 붐을 상징할 만한 힙합계 인물 모두를 자신들의 지장 아래 아우르며, 그 시대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넣은 곡이었다. 구 무브먼트를 위시하여 힙합 커뮤니티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연이 있었던 인물들과, YG 소속으로서 연을 쌓아간 인물들이 한 곡에 모두 모였는데 이처럼 너른 섭외로 청자를 정서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다. 헤이터 이야기가 힙합의 전통적 주제인 만큼 다수의 퍼포머를 아우르는 데에 적합했던 한편, 이를 진두지휘한 본인들이 헤이터로 인해 고초를 겪어 주제를 청중에게 납득시키기에도 용이했다. 이와 동시에 세로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게시하며 신선한 접근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 역시 에픽하이에게 동시대성을 부여하기에 무척 좋은 접근이었다. 당시는 인스타 스토리도, 틱톡도 없던 시절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들이 ‘Born Hater’를 통해 YG 소속으로 유튜브에서 흥행을 이끌어낸 것은 이후 이들이 해외 투어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데에 큰 발판이 되었다. 지금에 비하면 소소한 규모였지만, 당시의 YG는 싸이의 소속사이자 빅뱅과 2NE1을 필두로 서구권 시장에서 팬덤을 쌓아간 중요 기획사로 소속 아티스트를 해외 시장에 알릴 만한 창구로서는 차고 넘치는 곳이었다. 소속사의 강점이 아티스트의 원 지향점과 맞닿아 있던 것은 이후 에픽하이가 투어 확대를 커리어의 방향으로 대대적으로 잡고 나아가기 시작한 것에 큰 장점이 되었다. 현재 에픽하이의 북미 투어를 가능케 한 시작점인 2015년 SXSW, 2016년 코첼라 참가가 ‘Born Hater’의 흥행과 무관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앨범 단 한 장으로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새롭게 납득시키는 경우는 정말 많지 않다. 더군다나 그런 앨범이 아티스트의 향후 커리어를 좌지우지할 시점에 발매되었다면, 그만한 드라마가 또 있을까? 나는 커리어의 기로에서 작정하고 승부수를 띄워 대성공하는 모습이 주는 감동이 이 앨범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앨범이 발매된 바로 그날 밤 ‘헤픈엔딩'을 필두로 차트에 줄을 선 장면이 앨범이 이야기하는 회복, 제자리로의 복귀처럼 느껴졌다. ‘Born Hater’로 시상식을 달구는 모습, “지금도 힙합이나 하고 다닌다”는 말에 담긴 자신감이 괜히 기뻤던 게 아니다.
[신발장]의 성공은 이후 에픽하이의 커리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쓰는 에픽하이 그룹명 로고와,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피쳐링 참여자들을 하루에 몇 명씩 공개하는 프로모션이 [신발장] 때 시작됐다. 이후 발매된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은 10월 23일이라는 발매 시기, 앨범의 구성이나 무드, 먹먹한 사운드나 ‘타진요'의 갖가지 여파를 드러낸 이야기 등의 측면에서 전작 [신발장]과 형제 관계에 있는 앨범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10집 [Epik High Is Here] 상편이나 [PUMP] 믹스테잎 같은 앨범들은 본인들의 바운더리가 [신발장]보다 넓음을 증명하려는 시도 같았다. 이후 작품의 노선을 [신발장]에 비추어 읽게 되는 것을 보면 [신발장]이 2010년대 이후 중견 뮤지션 에픽하이를 성립하고 규정하는 강고한 틀 같다.
그렇지만 고작 앨범 한 장이 사람을 규정하는 지배력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는 곧 그 앨범이 아티스트에게 가져다 준 과실이 막대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픽하이를 보고 자란 세대가 공연 티켓과 굿즈를 살 경제력을 갖추고 사회에 자신의 견해를 표출할 때, 음악을 세계 곳곳에 보다 쉽게 알릴 수 있게 되고 한국 음악계가 그 흐름을 타기 시작했을 때, 그 시대 속에서 빛날 수 있는 자리에 에픽하이를 데려다 놓은 작품이 [신발장] 이다. 직접 만든 기획사에서 자비로 풀 렝스 앨범을 만들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연말엔 핸드볼경기장을 사흘쯤 매진시키는 지금의 에픽하이를 [신발장]의 성공 없이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 점에서 [신발장]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신발장] 앨범과 그 이후 에픽하이의 커리어를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나가는 이정표로 써볼 것을 제안한다. 폭력을 겪으며 현실과 자신을 몇 번씩 부정했어도, 그 시기에 사람이 붙들려 있는 것 같아도 이후의 삶을 괜찮게 꾸려갈 수 있다는 예시가 내게는 그들이었다.
2010년대 이후 에픽하이와 타블로가 낸 앨범 중 타진요 사건을 직접적으로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이 [신발장] 이다. [열꽃]이 드러낸 상흔과 [99]의 도피 이후 ‘제로 베이스' 위에서, 에픽하이는 앨범 첫 곡 ‘막을 올리며'부터 잘 해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이후 전투력 넘치는 ‘부르즈 할리파'와 ‘Born Hater’ 속에 타진요를 대항할 대상으로 설정하고, 사랑, 물질만능주의, 인간관계, 인터넷 등을 바라보는 곡들로 삶의 단면을 차곡차곡 적은 뒤, ‘Life is Good’와 ‘신발장'을 통해 나름의 행복을 그린다. 그렇게 삶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첫 호응은 다름 아닌 앨범 발매 당일 밤 이 앨범으로 줄이 선 멜론 차트였다. 음원 차트 꼭대기의 ‘헤픈엔딩'과 시상식을 달군 ‘Born Hater’를 통해 본인들의 영향력을 되찾는 에픽하이의 모습이 타진요 사건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앨범의 주제를 완성했다.
나는 이보다 더 폭력 이후의 삶을 잘 그려낸 아티스트와 작품을 아직 찾지 못했다. 기나긴 회복 과정에는 어떤 작품으로 만들 만한 극적인 장면보다는 앞으로 갈 듯 뒤로 갈 듯 지리한 모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극적인 사건이 주는 자극이 기억에 잘 남다 보니, 예술과 일반 대중의 인식을 막론하고 대체로 피해와 징벌이 회복보다 더 많이 거론된다. 징벌이나 가해자와의 분리가 쉽지 않은 사회 특성상, 정확하게 이루어진 어떤 종류의 징벌은 당사자는 물론 이야기를 전해듣는 사람에게도 해방감을 준다. ‘사이다'란 말이 그래서 나왔을 거다.
그렇지만 징벌이 회복보다 더 많이 언급되는 사회 풍토가 폭력 이후에도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혼란을 준다. 어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의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고 직장에서 잘렸다고 해보자. 가해자가 감옥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삶이 이전으로 돌아갈까? 그건 회복의 시작일 뿐, 그 시점부터 괜찮은 삶을 만들려면 가해자의 처벌과 별개로 피해자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폭력을 겪지 않았다면 안 해도 되었을 노력을 굳이 해야 하는 건 억울하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삶다운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은 삶과 회복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보일 때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의지는 절망으로 바뀐다.
이런 사회에서 2014년 이후 에픽하이는 폭력의 그늘을 걷어내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삶을 회복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예시 중 하나다. 사실 에픽하이가 보여주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힘을 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보는 것, 그 과정에서 오는 하루하루의 기쁨과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나누는 것, 그것을 쉬지 않고 오래 하는 것. 그렇게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와 있는 것이 그늘이 걷혀진 일상과 자신의 그늘을 유머로 쓸 수 있는 여유다.
[신발장]의 대성공은 그 긴 시간의 한 빛나는 점이자, 이 회복의 드라마를 한 장으로 요약한 버전이다. 그들이 해냈으면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한번 믿어보길 권한다. 나도 그렇게 믿길 잘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