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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 Oct 21. 2024

[신발장 10주년] 2편

삶을 만들어준 사람과 시간

내게 [신발장] 앨범과 그 이후 에픽하이의 커리어는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나가는 이정표였다. 또래 사회에서 겉돌다가 동네 탈출을 꿈꾸며 ‘Born Hater' 뮤직비디오를 보던 중학교 3학년이 아저씨 상사 4명과 회식 자리에서 소고기와 맥주를 배 터지게 먹고는 ‘미슐랭 CYPHER’를 들으며 자취방으로 향하는 직장인이 되는 과정 사이에 그들이 구석구석 끼어 있다. 정확히 10년의 시간 속 중요한 일들 몇 개를 정리해 본다. 그 소소한 삶을 만드는 것도 사실 쉽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니까.


그와 같이 올라간 부르즈 할리파

사진 출처는 스포일러+헤픈엔딩 뮤직비디오. (https://youtu.be/M8GUlNNXBVg?si=zgWpvogZzukIpeWS)


2014년 당시 나는 ‘스포일러' 뮤직비디오의 배경인 바로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음악이 ‘헤픈엔딩'으로 바뀌며 등장하는 횡단보도가 당시 살던 집에서 10분 거리였다. 그곳은 그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온갖 뮤직비디오와 드라마에 나오던 예쁜 신도시였지만, 그곳에서의 학창시절은 건물 모양과 달리 아름답지도 깔끔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똑같은 똑단발에 교복을 입고, 살구색 스타킹 투성이인 교실에서 혼자 까만 스타킹을 신으면 수군거리는 사람이 나오는 교실에서 지냈는데 그 현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나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았던 사람이 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혔던 사람의 수보다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 있었으니 자세한 건 알아서 추측하면 된다.


그 생활 속에서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이 아닌 다른 것, 남들처럼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하루하루를 함께하는 삶 뿐이었는데, 남들은 너무 쉽게 얻는 것 같은 일상 앞에서 나는 매일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입시를 통과하여 다른 동네에 있는, 인천 전역의 아이들이 몰려드는 어느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학교가 대학을 잘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따져도 중학교와는 다른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에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 더 그랬다. 그게 내게 지금까지 학교와 회사를 막론하고 가장 간절한 입시였다.


청자로서 에픽하이를 제대로 만난 게 그해였다. 휴대폰 가게 아저씨가 넣어줬던 음원 중 프라이머리 ‘자니', ‘씨스루' 같은 곡들 사이 에픽하이 ‘춥다'가 있었다. 왠지 들을수록 듣기 좋은 음악 속, “배를 띄워 다가오면 알겠지 내가 섬이 아닌 빙산인 걸" 이란 가사가 귀를 계속 맴돌았다. 가사 속 외로움, 공허, 냉소가 와닿을 때쯤 나는 다른 곡들을 검색해서 찾아봤다. ‘타블로 펀치라인' 모음집 동영상을 듣고 ‘세상에 이런 음악이',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게 그해 봄이었다. 날이 더워질 때쯤 찾아들은 [열꽃] 은 고립, 절망, 슬픔, 그 속의 희망을 알려주었다. 모르는 감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나, 그런 감정을 품고 표현해도 된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가을이 되기까지 몇 달의 기간은 힙합 그룹 한 팀을 샅샅이 몰입해서 살피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열꽃]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고립과 슬픔과 고통이 익숙한 사람, 이해받지 못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에게 닥친 절망을 이야기하는 앨범이었다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블로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예능 프로그램보다는 SNS에서 더 쉽게 마주할 법한 ‘너드' 혹은 ‘오타쿠'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두 단어 모두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잘 알려진 단어가 아니었으니 한국 예능에서 어찌 저찌 머리를 짜내어 ‘4차원'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 같다. 집단생활과 상성이 안 맞는 학생이 해외를 오가며 성장했으니 그 어디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이 익숙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도 겉돌던 애가 사회생활을 해낼 수 있다는 게, 자기가 속한 사회와 부딪히는 모습도 누군가의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꽤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이 왔고,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Born Hater’ 뮤직비디오를 보고 새 앨범을 들었다. 인생 중대사를 앞두고 최애 가수가 대업을 이루는 모습은 당연히 청자로서 큰 자극이 되었다. 면접 보러 가는 길에서 귀로는 ‘부르즈 할리파'와 ‘Born Hater’를 반복해 들었고, 그렇게 합격을 해서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되니 음악 속 그들과 내가 함께 승리한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환경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본 경험은 이후 짜릿한 성취의 기억이 되어 내게 꽤 큰 자신감을 주었다. 그래서 내가 가을을 좋아하게 된 걸까?


그러나 ‘원하는 학교에 가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가 결말이 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좋아진 건 그뿐이었다. 친해진 사람은 여전히 손에 꼽혔고, 학교생활의 여러 요소에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곤 했으며, 돌이켜보면 치료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울과 회피에 수시로 시달렸다. 소위 ‘대문자 E’가 드글드글했던 판에서 나는 내 존재감을 드러내고 기회를 찾아내는 데에 전혀 능하지 못했고, 입시도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비스무리한 무엇인가를 만들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도저히 재수를 못 하겠어서 떠밀려 진학한 대학에서 책을 30분 이상 집중해서 읽지 못하는 나날을 겪으며 알았다.



그들이 만들어준 동지와 현재

수능이 끝났는데 하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났다. 그나마 생각난 일이 음악 블로그 운영이었다. 수능 한 달 앞두고 에픽하이 9집이 나오자 인강 보던 컴퓨터에서 앨범 리뷰를 적으면서 그걸 어딘가에 올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첫 해 30분 이상 집중해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음악 듣기와 블로그 글쓰기 딱 두 가지밖에 없었으므로 블로그 시작은 곧 그 해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그 시절 내 블로그는 사이버 버전 벽 보고 소리 지르기에 가까웠다. 할 말은 너무 많은데 그곳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곳이 없어서 그랬다. 음악 이야기 사이에 내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적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는데, 보고 자란 게 타블로라서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는 자기 음악에 ‘사는 건 누구에게나 화살 세례지만 나만 왜 맘에 달라붙은 과녁이 클까' 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내가 깊은 얘기 하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지르기'를 잘 읽었다며 좋아요를 찍고 말을 걸어준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긴 건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나를 음악 글 쓰는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 데에 기여한 사람을 한 사람만 꼽자면 만능초보 님이 나올 거다. 그가 일부러 나를 소개했다...까지는 아니고, 만능초보 님을 이미 알던 사람들이 어째서인지 온라인상에서 자주 붙어다니는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준 것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같은 가수 좋아하는 또래를 발견하고 혼자 기뻐했는데, 음악 얘기든 사는 얘기든 글로든 대화로든 은은하게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친해진 친구와 몇 달 간격을 두고 순서대로 웹진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게 된 게 놀라운데, 나로서는 온라인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꾸준히 친구로서 있어준 그가 부디 행복했으면 할 뿐이다.


온라인으로 시작한 가장 드라마틱한 만남을 한 장면만 꼽자면 김오종 님을 만난 날이 생각난다. 2019년 11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학교 강의가 끝나고 그 분을 만났다. 그분은 내가 글을 써서 잘 될 수 있을 거라며, 꾸준히 본격적으로 글을 써 보라며 많은 응원을 해주셨다. 그러나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 건 글을 써보라는 독려보다 언론사를 그만두고 코딩을 시작한 그의 인생 궤적이었다. 그 분을 뵈었던 그날은 그분이 코딩 부트캠프에 들어가기 위해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신 날이었는데, 왜 하필 그날이 그날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IT 업계에 들어가기로 하면서 그 만남을 자주 떠올리게 됐다.


트위터 계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모 광고 회사의 공고를 보고 잠시 인턴으로 일했던 경험도 적어두고 싶다. 비록 두 달 만에 잘렸지만, 그 블로그와 트위터를 포트폴리오 삼아 입사하고 이런 저런 생존 스킬을 배우다 보니 나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보게 됐다. 거기서 생애 처음으로 만난 현업 개발자님도 에픽하이의 팬이었던 건 덤이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매개로 내가 원하는 형태의 네트워크를 하나씩 쌓고 원하는 일을 해나갈 수록 머릿속의 구름은 점점 걷혀갔다. 두뇌 리소스의 30%쯤이 과거사에 잡힌 채 지하철 터널에서 심장이 오작동하던 상태로 20대를 시작했는데, 조금씩 노력해보니 비록 부족하지만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2021년 초에 웹진 필진 활동을 시작하고 그해 가을 민음사에서 기고 청탁이 온 일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준 결정타였다. [열꽃] 10주년을 맞이한 그날 아침 민음사 앞에서 편집자님을 만나고 저녁에 음악으로 친해진 친구들을 만나 수제버거를 먹으며 든 것은 축배였다.


이후 IT 회사 조직생활을 목표로 한 나에게 에픽하이는 소원 성취 기원 부적이 되었다. 취업 준비생 시절 집안의 악재 속에서 황당한 계기로 면접을 떨어진 날이 하필 미리 예매해 둔 작년 연말 콘서트 날이었다. ‘Fly’의 “누가 뭐래도 나는 절대로 내 꿈을 포기 못해"가 실은 꾸던 꿈이 여러 번 엎어진 이들의 절규였다는 걸 그날 핸드볼경기장에서 목 놓아 외치며 느꼈다. 그런데 공연 다음 주 화요일에 지금 다니는 회사의 입사 제안이 왔고, 그 해가 끝나기 직전 입사와 독립이 결정됐다. 그 부적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외롭던 사람, 어떤 희망편

좋아하는 것을 통해 오래된 콤플렉스를 해결해본 기억은 쉽지 않았던 20대를 10대보다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준 기반이 되었다. 무척 겉돌던 시절 학교보다도 힘들다는 사회생활은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에 붙들려 있었는데, 지금은 나 하나 정도는 건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삶은 소소하지만 이게 ‘희망편'에 해당한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사진 출처는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100726/30108995/1


숱한 히키코모리 탐사보도가 “A씨는 어린 시절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고 학교폭력을 겪었으며, 사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방에 자신을 가두고~” 로 시작한다. 내 삶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절망편'이 저랬을 것 같다. 내 행동 하나하나, 타인이 나를 대하는 시그널 하나하나에 매몰되고 매사를 두려움으로 연결하는 감각을 잘 안다. 거기 매몰되어 자괴감에 쌓여 있던 시절의 증상이 공황이었다는 것도, 고립이 관성이 된 사람이 그걸 깨기가 어렵다는 것도 안다. 여전히 삶은 소소하지만 그 관성을 깨고 나를 건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꽤 괜찮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삶이 전진하지만은 않을 거다. <한편>이 발간된 바로 그 해 심장이 다시 한 번 오작동하며 인생이 뒤로 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해를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그동안 음악을 좋아하며 쌓은 사람들과의 시간이었고, 그 덕에 삶은 오래 지나지 않아 궤도를 찾았다. 이렇게 삶을 꾸려 나가면 어떻게든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으니, 이건 감사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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