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아는 유일한 ***가 나여도, 내가 그 세계의 전부일 수는 없잖아
얼마 전 김계피 작가님의 브런치에 올라간 한 인터뷰에 참여했다. 소설가, 시인, 평론가를 불러 ‘생활문학인’의 가능성을 논하는 이 인터뷰에서 나는 무려 ‘평론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왔다. 오는 기회 피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하기는 했지만, 사실 어느 직군을 대표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나의 견해를 쓰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속한 직업 세계의 현황을 소개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보니 같은 직군의 다른 동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를 할까, 혹시 그 안에서도 다양한 위치가 있는데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비슷한 고민을 해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분에 넘치게도 나는 민음사 <한편> 잡지 편집자님이 만난 첫 음악 평론가가 되었다. 편집자님 앞에서 청탁의 계기가 되었던 내 글 이야기를 하면서, 글에 소개했던 몇몇 논쟁거리를 설명해야 한다는 게 꽤 골치아픈 일이었다. 음악과 장르에 대한 입장은 각자의 취향과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데, 나는 내 입장을 적었지만 이에 근본부터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생기게 되어 있다. (글을 썼을 때도 그러리라는 걸 예상했지만 정말 그랬다.)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때 내 답변이 과연 맞는 말이었는지 몇 달 넘게 떠올리기도 했다.
창작자와 그 창작 분야를 다루는 평론가는 모두 결과물을 통해 이름을 알려서 커리어를 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과물을 통해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뿐만이 아닌,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게 된다는 것도 공통점이 된다. 창작자도 평론가도 아닌 다른 향유자에게서 창조적 해석이나 헛된 기대를 당하여 벙찐 느낌이나 황당함, 분노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 역시 공통점이 될 것 같다.
향유자로서 하기 쉬운 헛된 기대 중 하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완벽하기를, 그가 속한 사회를 완벽히 대변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향유자의 입장에서는 완벽에 닿는 게 한 끗 차이 같아 보인다. 그 창작자가 놓친 것이 내 눈에는 보이니까 딱 보이는 만큼만 나아지면 좋아질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입장이 되면 그 차이가 절대 한 끗이 아니게 된다. 그 한 끗이 나라는 사람이 태생적으로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한 마디 두 마디를 더하려다 보면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게 된다.
나도 일반 향유자로서는 이런 헛된 기대를 꽤 많이 했다. 헛된 기대를 하다가 헛된 이유로 화낸 적도 있었으니까. 일반 향유자로서는 창작자에게 불가능한 완벽을 기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최근 공식 평론에서 봤을 때, 꽤 크게 화가 났던 기억이 난다. 당신도 돈 받고 글 쓰는 사람인데 어떻게 개인이 사회를 완벽히 대변하기를 기대하는 거냐고, 그 잣대가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가면 답이 없어지는 줄은 아냐고.
살다 보면 내가 타인에게, 내가 내 정체성 중 하나를 대표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나도 비슷하게, 특정 인물을 통해 특정 상황이나 정체성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특정 정체성이나 집단 등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두려고 한다. 그 편이 나와 타인에게 너그러워지는 길인 것 같아서다. 뭔가를 표현하는 일이 나에게 꽤 중요하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