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구 Jun 25. 2020

오늘 처음 명품백을 샀다

언제나 비우고 채우고 싶은 버킷 리스트

 오늘 처음 명품백을 샀다.

 정확히는 엄마의 환갑 생일 선물로 처음 명품백을 결제했다.


 서른의 중반, 아무리 빠른 생을 들먹이더라도 나는 빼박 서른의 중반이다. 그런 내게 명품백은 사실 아웃 오브 안중... 이라기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은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큰돈을 들여서 살 필요는 없는 존재였다. 그 반증으로 나는 요즘 매일 똑같은 백을 매고 다닌다. 물론 간헐적 출근을 하는 프리랜서로써 그다지 밖에 나갈 필요성이 없을뿐더러, 그 가방이 수납의 면에서 내가 가진 가방들 중 가장 으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가방은 무려 얼마 금액 이상의 책을 주문하면 받을 수 있었던 도서 사이트의 굿즈 에코백이다. 다른 에코백과는 다르게 데님 소재의 이 백은 형태가 무너지지 않을뿐더러 때도 잘 티 나지 않는 색상이라 나의 수족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다. 덕분에 아무리 내가 좋은 브랜드의 가방을 가졌더라도 매일 출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면 그 어떤 명품백도 대부분의 시간을 서랍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괜히 명품백을 쓰는 사람들을 사치스럽다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정작 나는 다른 것들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돈을 쓴다. 가령 술 값이라거나, 술 값이라거나, 술 값이라거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남들은 '왜?'라고 할 만큼 나는 흥미로운 술을 마시는데 큰돈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명품백을 사는 것이 내게 어떤 사치라고 느껴진다기보다, 정확히는 내겐 그냥 다른 데 쓸 곳이 많기 때문에 더 큰돈이 생기면 생각해 볼게-라고 느껴지는 후 순위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내가 오늘, 처음 엄마의 명품백을 주문한 것은 사실 올 초를 시작하면서 정리한 '올해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엄마 다음엔 돈 많이 벌어서 에르메땡 사 줄게

 지난해 나는 두 번에 걸쳐 수술했던 과거 지병으로 근 7년 만에 세 번째 수술을 했다. '뭐 같은 병명의 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세 번을 못하겠어?'라고 했던 나의 호기로움은 수술 직전 산산조각 났다. 그전 수술은 단지 혈관에서부터 뻗어 난 종양을 제거했더라면 이번 수술은 그 종양이 직장과 맞닿아 있었다. 덕분에 나의 수술은 직장암 수술과 같은 수순을 밟게 되었다. 수술 이후 근 일주일을 물도 마시지 못했으며, 직장에 삽입된 관 때문에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들었다. 물론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비록 더뎠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수술 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때의 고통은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서울에서 수술을 하면서 나의 병간호는 막 은퇴를 한 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다행히도 국가에서는 이미 자체 간병인 시스템을 포함한 입원실을 운영했고 아버지는 정말 직장인처럼 면회가 가능한 9시에 출근을 하셔서 6시 칼 퇴근을 하셨다. 물론 내가 있던 병동이 산부인과 병동이라 아버지가 유독 불편하셨을 것이다. 반면 고향인 부산에서 매일 8시면 출근하는 엄마는 그런 나를 두고 자신이 출근을 한다는 것을 매일 아침 죄스럽게 여기셨다.


 엄마는 곧 정년을 앞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무려 36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8시에 출근을 하셨다. 그런 엄마와의 매번 통화 레퍼토리는 '요즘 애(혹은 학부모)들은 옛날이랑 달라'이다. 물론 그럼에도 엄마는 꽤 좋은 선생님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령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학부모들이 자주 개인적인 전화 상담을 하며 엄마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같은 라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 과거 제자들이 매번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라면 '대체 이런 것 까지 왜?'라고 할 만한 것들을 엄마는 늘 감내한다. 그러면서 늘 마지막에 하는 말은 '이거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엄마는 늘 그랬다. 조금은 미련하다시피 자기보다 남이 더 중요한 사람. 그게 가족이라면 더 했다. 대학 초년생인 내게 비싼 옷, 비싼 구두는 척척 사주면서도 자기는 아까워서 싼 것만 찾아다녔던. 그래서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비싼 것들을 살 수 있으면서도 사지 않는 엄마의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것도 그럴 것이, 과거의 엄마는 선물 받았던(당시는 김영란 법이 없어서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선물들이 들어왔다) 고가의 화장품들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서랍 깊숙이 모셔 놓았기만 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더욱 엄마가 그런 것들을 '못'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활자로 쓰고 나니 너무 틀에 박힌 말 같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어떤 연유에서 인지 문득 엄마에게 명품백을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직전 엄마와의 통화에서 엄마는 마지막으로 내게 '행복해라'라고 했다. '행복해라'. 그 말에 울컥했다. 이 커다란 세상 속, 어떤 누군가는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나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쉽게 뱉을 수 있는 그 '행복하라'는 말이 나는 내 엄마의 가장 큰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이전에도 알고 있었겠지만 유난히 그날의 그 '행복해라'는 처음으로 내게 그 문장 그대로 와 닿았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 사람은 그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선물해야겠다 생각했던 그 명품백은 다름 아닌 그녀가 그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그녀가 바라는 만큼 내가 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행복해라'


 엄마는 이미 내게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주변 사람들의 자식들은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고, 좋은 사위/며느리를 두었으며, 손자/손녀들의 재롱을 보고 있었다. 한 없이 주변과 비교하며 툴툴 대던 엄마도 어느덧 환갑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자신은 욕심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고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욕심은 내가 억지를 부려 내려놓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놓은 욕심을 대신한 자리가 나의 행복이라는 사실이 나는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것을 보상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명품백을 샀다. 적어도 그 마음을 조금이라고 갚고 싶어서. 나는 엄마가 본인이 못하는 것들을 내가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항상 그랬다. 본인은 못한다고 여겼던 재능으로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사람들에게 나서길 두려워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내가 다른 사람과 스스럼없이 지낼 때, 본인이 가장 싫어했던 영어를 내가 어려움 없이 구사할 때, 그녀는 자신이 못하는 것들을 대신하는 나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대견해했다. 그것을 이용하여 나는 오늘 카드를 긁었다.


 결제 직전 배송 메시지를 쓰는 칸에 나는 그녀가 내게 해 준 그 말을 그대로 썼다.

 '엄마가 행복하기를'이라고.

 부디 내 선물을 받은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