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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reads Apr 16. 2020

세월호 6주기 | 그 날 제 하루는 온통 노랬습니다

세월호와 하늘로 사라진 친구들을 추모하며

 때는 철없던 고등학교 2학년 국어 시간.


 유독 날이 흐렸고 나는 교탁 앞 두 번째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유난히 활발하고 시끄러웠던 낭랑 18세의 우리 반 아이들은 수업 중이었지만 동시에 놀고 있었다. 학구열이 꽤나 높은 학교였으나 우린 한창 놀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들이었고 내년에 있을 수능 따위도 별로 고려대상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봄이 찾아오고 있었고 우리에겐 수학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은 어리고 철없던 우리들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교실의 앞문으로 나가면 등나무 벤치가 자리했고 그 옆으로는 학교의 상징인 목련 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만 되면 가장 빠르게 반에서 빠져나와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학교 복도, 등나무 벤치 그리고 급식실과 이어진 산책로들을 배회했다. 우리 학교는 삼삼오오 모여 산책하기 좋은 학교였다. 나는 학교의 봄을 좋아했다. 쌀쌀했던 날씨가 풀리면 더 이상 후리스를 입지 않아도 검은색 스타킹을 신지 않아도 되었다. 교실은 난방도 잘 안 되어 초 봄까지는 옷을 껴입어야 했기에 봄이 온다는 것은 더 이상 추위에 떨면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매점 바로 앞에 자리 잡은 반인 동시에 아주 특이하고 개방적이었던 담임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학기 초반이자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부산스러웠고 각자의 방식으로 국어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상 앞에 모니터를 열심히 쳐다보며 필기를 했고 누군가는 좌석 맨 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또 누군가는 스탠딩 책상에 나가거나 옆에 앉은 친구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의 자리는 교탁 앞이었지만 놀기 좋아하는 학생이었기에 적당히 친구들과 떠들고 적당히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고 의미 없었지만 때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도중 갑자기 한 친구가 큰 소리로 뉴스 속보에 대해 알려왔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을 태운 한 유람선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가라앉고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수업시간에도 불구하고 급한 마음에 모두가 핸드폰을 꺼냈다. 선생님도 핸드폰을 꺼낸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상황을 빠르게 전했고 선생님은 괜찮아질 거라며 어수선해진 반의 분위기를 정리했다. 오전 10시, 창밖의 날씨는 아직 흐렸고 아직 2교시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우리는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은 정신으로 포털 창을 새로고침하며 이 기사가 사실이 아니거나 빨리 사람들이 구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후 세월호에 타고 있던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확인하고 모두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선생님은 수업을 재개했고 우리는 점차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다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4교시가 끝나고 나는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갔다. 점심시간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보통 다채로운 주제들로 채워졌지만 주변엔 온통 세월호와 기사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알고 보니 전원 구조의 기사는 사실이 아니었고, 제대로 된 구조 작업도 이뤄지지 않은 채 세월호는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구조될 줄 알았던, 그래서 몇 시간 동안신경 쓰지 않았던 그 순간들이 무서워지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했다. 헬기가 선박 위를 돌고 있는 영상이 보였고 배는 기울어진 채로 확실히 가라앉고 있었다. 무서움이 엄습했다. 이 배가 설마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겠지. 제발 아니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5교시, 내가 좋아하는 중국어 선생님의 동료 교사셨던 분이 단원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라는 말을 들었고 선생님은 하도 울어 지쳐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친구의 증언이 들렸다. 착잡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가득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살아주세요.' 수업 시간에 18살의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고요하고 유일한 외침이었다.

 기사를 통해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며 학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내자신이 답답했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우리 모두는 무력했다. 그저 멍하니 새로운 뉴스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와서도,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 믿기지 않는 뉴스의 제목을 보면서도 나는 이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 깨있을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 이게 현실이어야 한다면 제발 구조가 이루어지기를. 바다의 바닥에서 추워하고 있을 친구들이 없기를 기도했다.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4월 중순의 어느 날,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울었고 쉴 틈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무고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제발 데려가지 말라고 세상에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필 그들이어야 하느냐고 하늘을 원망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탓에 그 날은 어떤 공부도 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울어 머리가 아팠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당시 수학여행을 갔던 단원고의 학생들은 18살, 나와 동갑이었다. 그래서 그 참담한 기사와 쏟아지는 속보들이 더 아프고 피를 말리게 했다. 그들이 평범한 인생을 살았더라면, 어쩌면 대학교에서 혹은 회사에서 동기로 만났을 사람들이었다. 나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시험을 준비하고 학교에 갇혀 스무 살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왜 못된 어른들의 말을 들었니, 대학생이 될 때까지만 좀 엇나가지 그랬어. 덜 착하게 살지 그랬어.

당시엔 모든 게 미웠다. 학생들을 학교라는 우리에 갇히게 만든 어른들이 미웠다. 그놈의 수능과 대학교 타령을 하던 선생님들이 미웠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던 덧없는 외침이 미웠다. 약자의 목숨보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얄팍한 자존심이 미웠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못난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시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겠다고.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비가 내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4월 16일.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의 꿈은 여전히 못난 어른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변화가 되길 바랐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재수학원을 빠르게 빠져나와 광화문으로 향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내겐 작은 투명 우산뿐이었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행진을 했고 사람들은 노란 우비를 입고 문화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은 우리 모두의 눈물만큼의 많은 비가 내렸다. 나는 우비가 없었기에 광화문의 맨 끝에 있던 천막 앞에서 우산을 쓰고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쏟아지는 비에 몇 미터 앞을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다만 내 앞에 단단한 노란색의 형체들이 강인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늦은 시각의 밤이었지만 광화문 광장은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 우리는 맨 처음 다짐하고 기억했던 노란색 마음을 나눴다.

 문화제를 지켜보며 뒤로 맨 묵직한 책가방이 비에 맞지 않게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결국 쏟아지는 비에 나도, 가방도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내일도 학원에 가는 학생으로서 책의 생사여부는 중요했기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몇 시간에 걸친 문화제가 끝난 후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했던 같은 반 친구들과 조우했다. 너무 많은 인파 탓에 행사가 끝난 후에서야 겨우 광화문의 한 빌딩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서로의 옷이 비에 흠뻑 젖은 것을 알았고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바로 앞에 있던 건물로 들어가 비에 젖은 옷을 벗어 말렸다. 우리는 각자 다른 대학에 붙었고 정말 바쁜 일상을 살고 있었음에도 이 날은 한 명도 빠짐없이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의 하늘이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빛이 없고 서늘했던 그날의 날씨. 교실에서, 교실 밖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그리고 하지 못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서 20살의 우리가 드디어 세상에 나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온몸으로 고작 책을 사수하려던 내 몸부림이 부끄러웠다. 그깟 비가 뭐라고 피하고 싫어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우산을 벗어던지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머리로 어깨로 받던 수만 명이 내 앞에 있었다. 말리면 그뿐인 한낱 책 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우리는 끝내 그들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바다에 오래 있었을, 지금도 남아 있을 사람들과 친구들을 기억하며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아주 춥고 시리고 슬픈 날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견디는 것은 온전히 어른의 몫이라는 것도. 영원히 아름다운 18살에 머물러 있을 그들의 청춘을 추모하는 것도. 세상을 바꾸어야 할 책임감과 우매했던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도 모두 우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 부끄럽게 살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본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 속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억도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리는지, 그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잊고 있었다. 못난 어른들은 툭하면 세월호를 정치적 이슈로 내세우며 편 가르기를 했다. 그들을 잊지 않으려던 순수하던 마음들도 매도당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지겹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겹도록 잊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애써 기억하려는 마음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누구보다 빛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바꿔줄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어언 6년.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어엿한 이십 대 중반의 청년들이 되어있었다. 정권이 한 번 바뀌었고 수많은 시위들을 했고, 우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 일 수 없었고 뻔뻔한 기득권의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정치인도, 언론과 검찰도 뭐 하나 특별히 달라진 것 없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변화를 꿈꾼다. 오늘도 미안한 마음을 모은다. 노란 리본을 달고 그들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무기력하고 참 아팠던 그 시절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6년의 세월 동안, 그때 심은 싹이 자라났고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로 인해 다시 꿈을 꿀 수 있었다. 미약하고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멋진 어른이 되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유독 기억에 남았던 6년 전의 회색빛의 슬펐던 하늘. 그리고 잊을 수 없던 그 날의 노란빛 세상. 흐리고 우중충한 날들이 지나가면 화창한 봄날의 하늘도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맑고 푸르른 하늘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너희는 어리고 철없고 장난꾸러기였던 예쁜 열여덟로 남아달라고 부탁한다. 이 세상은 이제 어른이 된 우리가 고치겠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겠다고 오늘도 여전히 그들에게 다짐하고 또 용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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