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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reads Apr 29. 2020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핀란드의 밤하늘 아래에서


춥고 어두운 북유럽의 날씨에서 유일한 위안이 되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었다.




"영하 30도의 날씨,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태양 그리고 흑야"는 내가 있던 핀란드의 겨울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들이다. 대부분의 날씨가 흐리고 어둡고 암울했지만 다행히도 가까운 거리에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시리고 무료한 날씨를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다.


 유럽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학기 초반, 낯선 땅과 낯선 학교에 적응도 채 안되었을 무렵에 굳게 닫혀있던 내 마음을 열어주려 노력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내가 만난 C는 핀란드의 같은 학교 교환학생이었다. 같은 튜터 그룹은 아니었지만 교환학생 친구들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우연히 인사를 하게 되어 가까워진 사람이었다. 처음 C를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가 나와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색해하지 않으면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걸었으며 나에게도 첫 만남부터 대화가 끊기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질문들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다정한 면모가 있었다. 특히 요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 자신이 한 요리를 나에게 나눠준다던가 자주 시시콜콜한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다. 가끔 여행을 다녀오고서는 친구들에게 기념품을 사주기도 했는데 한창 해를 못 보고 우울해하던 내게 독일에서 비타민을 잔뜩 사다 주고는 꼭 챙겨 먹으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는 언제나 내게 친절했고 베푸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매번 나만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는 내게 바라는 게 없다며 우린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핀란드에서는 가끔 혼자 밤에 잠이 안 오거나 생각이 많아지면 나는 근처 공원이나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오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밤이 너무 길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번은 자정이 거의 다 된 무렵에 혼자 또 산책을 나가려던 나는 아파트 로비에서 막 운동을 끝내고 들어온 C를 만났다. 어디를 가냐는 그의 물음에 잠시 산책을 갔다 올 거라고 하니, 그는 "이 시간에?"라고 물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고 하니 그는 다음에는 자신과 같이 산책을 가자고 내게 말했다. 그는 내가 우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걸, 혼자서 그 감정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는 내 우울한 기질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그의 말이 좀처럼 마음에 걸려 산책을 혼자 가지 않았다.


 늦은 밤에는 거리에 사람이 잘 없었다. 춥고 흐린 날씨도 텅 빈 거리를 만드는데 한 몫했지만 야외 바베큐나 캠프파이어를 하기에도 바람이 꽤나 불어서였다. 사람들은 점차 따뜻한 집과 사우나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한적한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있자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나는 빼곡한 자작나무들 사이로 걸으면서 이 세상에 왜 태어 난 건지,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무엇인지 몇 번을 되뇌다가 집에 들어왔다. 끊임없는 물음에도 스스로 대답하지 못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C를 불러 산책을 가기 시작한 이후, 그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가 하는 질문들에 유일하게 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눈이 펑펑 내리던 밤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 주변을 함께 산책했다. 그는 핀란드에 와서야 눈을 처음 봤다고 내게 고백했다. 어떻게 눈을 처음 볼 수가 있냐고, 스키장도 한 번 안 가봤냐는 나의 말에. 그는 그렇다고, 인생에서 처음 맞아보는 눈이라며 민망해하면서도 이는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첫눈을 나와 맞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저 조금 심심하고 외로워서 그와 함께 걸은 것뿐이었는데 내게 무척 고마워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오렌지색 가로등 밑에서 눈 내리던 길을 같이 걷던 오늘 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집 앞에 있는 호수를 한 바퀴 돌고서는 뒤에 있는 숲을 지나 옆 동네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는 내가 그만 가자고 할 때까지 묵묵히 따라 걸었다. 눈은 절대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싸락눈은 어느덧 함박눈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에 우리가 밟는 땅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환한 밤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시덥지 않은 얘기들과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면서 밤새 걸었고 그와 함께 걷는 것은 적어도 내가 하던 걱정과 고민을 잠시 동안은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핀란드는 그 이후에도 자주 눈이 내렸다. 10월이 지나고서는 맑은 날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나는 겨울을 날 수 있는 긴 겨울 부츠를 장만해야 했다.


 눈이 오지 않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맑고, 하늘에는 별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날 밤이었다. 습관적으로 오로라 예보를 확인하던 우리는 그날 밤에 오로라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집에서 몇 키로나 떨어진 큰 호수에 가기로 했다. 무장을 하고 나오긴 했지만 우리는 긴 어둠 속에서 한참을 견뎌야 했다. 호수를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숲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기에 우리는 느낌으로 걸었다.

그날따라 숲과 호수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나타나지 않을 오로라를 한 번 기다려보기로 했다.


 호수 앞에는 서리가 낀 의자가 하나 있었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벤치는 호수의 정면도 아닌 이상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지만 꽁꽁 언 바닥에 앉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서리를 조금 걷어내고 벤치에 가지런히 앉았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호수는 고요한 겨울 분위기를 자아냈고 우리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검은 하늘엔 별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있는 이곳이 과연 지구가 맞는가.'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별이 있는 하늘은 처음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별이 열 손가락 이상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쉽게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모든 계절의 별자리와 행성을 한눈에 담아내는 기분이랄까. 이상했다. 이상하리만큼 꿈같았다.

 눈을 보는 게 처음이라던,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던 그의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한참을 그렇게 우리는 말이 없었다. 아무 말없이 벤치에 누워 별이 수 놓인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핀란드의 밤하늘에 압도되어 버린 탓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더 이상 기억해낼 수도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찰나 우리는 동시에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소원을 빌었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던 건 10년도 더 된 일이었는데 그날 밤 내가 본 것은 유성우가 확실했다. 오랜만에 만난 유성우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많은 걸 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소원을 빌기엔 반짝하고 너무 빠르게 지나갔지만 나는 유성을 본 직후 소원을 빌었다. '내 사람들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모든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꽤 속물적인 소원이었다.


 오늘은 오로라가 보인댔는데. 하늘에 수 놓인 별들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오로라를 잊어버린 후였다. 처음 보는 그 광경은 생의 경이와도 같았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한 번도 없었다고 얘기했다.

 그럼 이런 날이 다시 올까?라고 물었다. 아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고 그는 대답했다.

'나는 벌써  곳을 떠나는 날이 두려워.' 그와 함께 있을  내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꿈에서 깨면 이런 날들이 한순간의 추억이 되어버릴까 , 믿지 못할  시간들이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쓸쓸하던 겨울날 ,   한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날들. 벤치에 누워   없는 별들을 멍하니 응시하 있던 날들이 아주 많이 그리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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