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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reads May 08. 2020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겠지

 


 엄마는 꽃다운 스물다섯에 아빠와 결혼을 했다. 어릴 땐 그저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구나 싶었는데, 어느덧 엄마가 결혼을 했던 나이가 눈 앞에 다가오니 엄마가 아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거의 일 년 동안 연애를 했으니 따지고 보면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스물셋이나 스물넷부터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한 것인데 나는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연애나 사랑을 하는 것을 보면 내 철없음이 더욱 부각되고야 만다.

 엄마는 결혼 일 년 후 오빠를 낳았고 그로부터 삼 년 후 나를 낳았다. 스물아홉 살에 나를 낳은 것이라 엄마와 내가 적당한 나이차를 가지고 있는 모녀지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어렸을 적 스물아홉이란 나이는 결혼과 출산을 하기에 너무 늦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숫자였다. 엄마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우리를 낳고 키우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모른 채로, 그렇게 살아왔다.

 

 여섯 살이 되던 해, 경기도의 한 위성도시에서 다시 서울 신촌 근처로 이사를 왔다. 그때부터가 내 유년 시절 기억의 시작이다. 가끔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빛을 따라가 보면 방에서 엄마가 논문을 쓰던 것을 기억한다. 장난꾸러기 오빠 덕에 항상 시끌벅적했던 우리 집 분위기는 그즈음 유난히 차분하고 고요했다. 아빠는 논문을 쓰고 있는 엄마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석사나 논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곰국을 거꾸로 하면 논문이 된다는 사실을 오빠가 알려준 후에 가끔 그 메모를 적어서 엄마에게 얘기해줄 뿐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면 왠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 뒤편을 혼자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방을 나온 적도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엄마의 대학원 졸업식을 갔다. 화창한 햇살이 비추던 날이었다. 엄마는 평소와 달리 아주 예쁘게 화장을 했고, 학사모와 졸업 가운을 입고 있었다. 엄마는 많은 사진을 찍었고 나는 눈이 부시는데도 억지로 사진에 찍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엄마가 엄마만이 아니던 첫 순간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학생이었다. 내가 잠들면 공부를 하고, 내가 유치원에 가면 엄마는 대학원에 갔다. 엄마도 꿈이 있구나. 내겐 집에서 우리를 돌보는 전업 주부가 직업이던 모습이 전부였지만 어쩌면 엄마는 엄마가 꿈이 아닐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던 새에 언제 공부를 하고 어떻게 논문까지 썼는지 알 수 없었다. 석사학위가 그렇게 어려웠던 건지도 그땐 몰랐다.



 내가 세상에 영영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건 중학생 때였다. 세상에 나오지 못 한 언니, 혹은 오빠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출산의 과정이 심상치 않았음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엄마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때, 한창 청춘이던 엄마가 아이를 잃는 슬픔은 어떤 것이 었을지 가늠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귀한 딸이었다. 임신을 하면 아파서 귤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소화가 되지 않아 매일 누워 있어야만 했던 그녀에게 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었다. 그래서 이십여 년도 전에 내가 저체중으로 태어났던 것을 아직도 마음에 걸려했던 엄마였다.


 학창 시절의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았거니와 툭하면 다치고 아프기 일쑤라서 엄마는 내 병원의 단골 메이트였다. 나는 여러 이유로 자주 아팠고 다양한 종류의 병원을 빠지지 않고 갔다. 생리통이 너무 심했던 탓에 대형 병원에서 하는 검사도 여럿 받았다. 엄마는 자신도 어릴 때는 생리통이 심해서 며칠은 집에서 잠만 잤다는 것을 고백했다. 엄마는 당시의 내가 아팠던 게 그녀의 탓이라고 여기던 마음에 열심히 나를 데리고 병원을 갔다. 보이지 않는 미안함도 나는 느낄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저 내가 노력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했고 가녀린 몸을 타고났다는 사실이 싫을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마르고 허약했던 탓에 엄마는 내게 특공무술 같은 운동을 시켰었는데 그때 좋아하던 오빠와 어색해진 후로 오래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사춘기를 겪은 후 배움에 대한 열정과 인내도 줄은 터였다. 건강하지 못 한 몸으로 스트레스를 한 껏 받으며 공부를 해대니 몸은 더 아파서 일상생활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집에서는 오랫동안 잠만 자거나 놀았는데 엄마는 그런 내가 못 미덥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는지 보양식을 챙겨준다거나 건강에 대한 잔소리를 자주 했다. 그런데도 나는 편식을 했고 건강한 삶과는 거리가 먼 날들을 보냈다.


 엄마는 나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내가 첫 딸이라는 것과 막내라는 것도 이유였겠지만 어릴 때 총명해서 한 때는 미국 학교에서 상도 받고 영재학교에 입학할 뻔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외국의 체스대회에 나가서 체스 선생님에게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들은 뒤로 나의 머리가 꽤 좋다고 믿는 것 같았다. 구구단을 맞으면서 외웠지만 사교육 한 번없이 시험에서 만점을 맞기도 했고 시키지 않아도 학교의 임원이 되어왔다. 미술학원을 금방 그만두었는데도 교내 대상을 받은 이후 미술과 음악에도 재능을 보인다는 선생님들의 유혹에 넘어가 엄마는 나를 유능한 젊은이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이상하게 어릴 땐 압력을 받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내게 엄마는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엄마는 내게 장벽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그녀의 기준에 맞아야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기준을 벗어나는 것들을 엄마는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나는 그럴수록 빠르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내가 진학하고 싶어 하던 유일한 학교에 크게 반대했던 것을 시작으로 나는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고 엄마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더 좋은 살림에, 더 좋은 부모가 돼줄 수는 없었는지 왜 어린애를 빨리 철들게 만든 건지. 하고 싶다는 것을 다 지원해준다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 꿈조차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미웠다. 엄마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더 이상 엄마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중학교 때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에 대한 편지를 친구와 주고받았었는데 집안이 난리가 났다. 한창 연애 감정에 호기심이 생길 창창한 나이인데도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편지에 나온 남자 이름에 이게 누구나며 소리를 질러대던 엄마에게 나도 화가 치밀어 올라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며칠 동안은 냉전 상태로 지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방문을 잠그면 또 엄마는 그게 못 미더워 나를 다그쳤다. 예민하던 사춘기 소녀의 감정이 제지당하고 검열당하던 그때의 모습이 트라우마로 남아 그 이후로는 엄마에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안 하게 되었다.


 불행할 때면 모든 게 엄마 탓 같았다. 쉽게 몸이 아플 때도. 중요한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준비한 기회를 다 날려먹고. 사랑에 실패했을 때도.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할 때도, 그리고 내 꿈을 지지받지 못할 때도. 불행한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건, 그리고 이런 나를 낳아준 건 엄마였기에. 왜 나를 낳았냐며, 왜 나는 태어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는데 살아가야 하나며 엄마에게 따지듯 묻곤 했다. 엄마는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말을 줄이고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맘 속 깊은 곳의 울음을 참아내고 있다는 듯 보였다. 엄마는 내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도 모른다고, 내 자신도 왜 태어났는지 어째서 이런 숙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내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완벽한 어른일 줄 알았다. 집안에서 맏이 었던 그녀는 대학원 석사까지 마친 인재였고, 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아이를 키웠다. 여러 개의 직업을 거쳐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자식의 엄마로 살아가는 그녀는 나보다 성숙하고 나보다 강할 줄 알았다. 그녀는 나보다 20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더 살아왔고 그런 그녀는 인생에 대한 대답과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치기 어린 질문을 받아들일 때면 그녀는 강인한 모습을 쉽게 잃고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에게 미안했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원망스러웠을까. 아니면 엄마도 그녀의 엄마를 원망했을까.


 엄마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할아버지에게서 자랐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이른 독립이 그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녀는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알 수 없었고 남들이 좋은 신랑감이라는 칭찬에 못 이겨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나름의 도피성 결혼이었지만 그녀는 유망한 중국어 선생님이었다.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왕복하며 학교를 다니던 성실한 학생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인생에 갑작스럽게 결혼이라는 게 찾아왔고 덩달아 새 생명도 찾아왔다. 그녀도 독립이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결혼과 출산과 육아도 처음이었기에 서툴었을 것이다. 어떻게 아이의 울음을 달래는지 몰라 아이를 안기도 하고 따라 울기도 했을 것이다. 남편과의 싸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혼자 앓았을 것이다. 돈을 저축하고 부동산을 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라 책을 사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살림꾼이 되었다. 촉망받던 선생님을 그만두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두 아이를 기르다가 그녀가 좇던 꿈을 잃었고, 그녀가 살고 싶던 인생의 목표도 잠시 잊어버렸다.
 

 엄마는 교육을 전공했음에도 좋게 훈육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이론에서 배운 것을 실전에 옮기기까진 많은 연습과 성찰이 필요했지만 아직 이십 대의 중턱이던 그녀에게 실전이란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을 안 들으면 매를 들었고 학원에 안 가겠다는 자식을 설득하는 대신 무섭게 화를 냈다. 호기심에 비해 가벼웠던 엉덩이에 시작한 것들을 중도에 포기할 때가 많았던 자식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미웠다.

 나는 어렸고 배움과 배움을 지속하는 게 어려웠다. 그런 나보다 삼십 년을 더 살았던 엄마가 아이를 나를 키워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엔 엄마도 연습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몰랐다. 처음 맞아보는 딸아이의 사춘기. 엄마는 나도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을 것이다. 삼십 년 전의 그녀를 잠깐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엄마도 딸을 키우긴 처음이었고 좋은 딸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닫지만 엄마는 내 모든 것에 태클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잘한 상처는 거대한 흉터가 되어 남았다. 그렇게 이십 년을 나는 엄마와 살았어도 엄마를 마음 깊숙이 사랑할 순 없었다. 내겐 언제나 인생의 결핍과 부족에 대해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바로 엄마였다.


 나는 내 삶을 좋아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엄마가 결혼했던 나이쯤이 돼서야 꿈을 정했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가 생의 동반자를 찾았을 무렵 나는 아직도 연애에 실패하길 반복 중이었다. 스물다섯 언저리 아직도 방황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까지. 그때의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게 밥을 잘 챙겨 먹으라던 엄마.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관리하라고 했던 엄마. 유치한 연애감정에 빠졌던 내게 경고를 했던 엄마.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내게 잔소리를 퍼붓던 엄마.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데에 누구보다 더 열정적이던 엄마. 그리고 이젠 괜찮은 사람을 만나라고 걱정하는 엄마.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서툴렀다는 것을. 당신의 딸이 당신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당신의 자식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누구보다 열망했던 사람임을. 성인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도 보고, 실수를 하며 깨져도 보고, 간절히 원하던 일들에 실패도 해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것을. 그래서 세월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일찍부터 알려주던 것이었음을.


 하지만 나는 엄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엄마는 내게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지만 내게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며, 정말이지 나는 엄마라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엄마가 엄마가 되기까지 어떤 고통들이 있었는지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뿐인데도 나는 그 어떤 고통도 받아들이기 싫고 시작조차 하기 싫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나는 엄마가 될 수 없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는 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살아온 시간은 오직 그녀였기에 가능했다. 그녀가 쏟았던 애정만큼 다른 이에게 나눠줄 자신이 없다. 나는 내 청춘을 바쳐가며 아이를 돌볼 만큼 마음이 곱거나 넓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나는 엄마에게 당신의 인생을 살라고 말한다. 두 자식들은 회사에 취직했고 돈을 벌기 시작했으며 그대들이 결혼했던 나이에 안착했다. 우리가 다 컸으니 엄마 노릇을 그만두어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는 어느덧 오십 대 중반. 삼십 년을 우리를 위해 살아온 엄마가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조금 벅찬 나이가 아닐 수 없다. 엄마가 서툴던 엄마는, 모든 것에 익숙해진 엄마가 되어버렸다. 삼십 년의 세월 동안 엄마는 더 굳건한 엄마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남편이 화를 내면 달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지친 업무에 힘들어하는 자식들에게는 편한 술친구가 되어줄 아량이 생겼다. 그녀는 자식들이 기어 다니던 때부터 사회 초년생이 되어버린 시간 동안 함께 엄마로서 성장했으며 결국 멋진 엄마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실수하지 않는다. 더 이상 요리를 하는데에 레시피가 필요하지 않고, 집안일과 인간관계에서도 매뉴얼이 필요 없다.


 엄마는 엄마로서의 인생을 살아내느라 그녀의 인생을 버렸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더욱이 엄마가 될 수 없다. 못난 딸을 위해 그녀에게 서툴었던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던 엄마. 생을 걸었던 엄마.

 엄마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는 게 무서웠으며 또 누구보다 잘 살고 싶은 마음들로 가득했던 청춘을 보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나 같은 딸이 처음이었고, 육아가 처음이라 서툴렀고 그래서 실수 투성이던 엄마가. 엄마의 생이. 그녀에겐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오늘도 그녀에게 한없이 작은 마음과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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