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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Dec 31. 2020

그 많던 엘리자베스는 다 어디로 갔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

 어렴풋이 생각나는 유년 시절이 기억들이 있다. 비 오는 날 플로리다의 디즈니 월드를 갔던 것, 탭댄스를 배운 뒤 친구들 앞에서 춤을 췄던 것. 아빠의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남쪽에 위치한 테네시주에 갔던 것. 2005년, 미국 테네시의 한 호텔에서 열린 체스 경기에는 한국에서 온 한 소녀가 있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체스에 입문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소녀였다. 바로 나였다.


체스를 배우는 엘리자베스


 어릴 적 내겐 체스 선생님이 있었다. 큰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아저씨였다. 무서운 인상과는 달리 따뜻하고 진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내겐 은사이자 드라마의 학교 관리인(샤이먼)과 같은 존재였다. 보채지도 혼내지도 않았던 선생님은 항상 나의 페이스를 맞춰주는 편이었고 그 덕에 나는 쉽게 체스에 흥미를 붙일 수 있었다. 물론 경기 중에는 딱히 영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한 몫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미국의 시골에서 체스를 시작했다.


 물론 그리 대단하고 호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다. 당시 거주하던 인디애나 주는 서울에 비하자면 깡촌과도 같았다. 주변에 동양인도 없었을뿐더러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집과 학교만을 반복하던 나날이었고 그저 모든 일상이 나의 친오빠를 따라 진행되었을 뿐이다. 오빠가 체육관을 다니면 나도 체육관을 다니고, 오빠가 다니는 공부방을 따라 등록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엄마의 정보력은 무섭다고,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느 날 어디선가 체스 선생님을 섭외해 온 것이다. 그렇게 오빠를 따라 체스를 접했고 그것이 내 체스 인생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그 선생님의 집에서 또래 아이들과 체스를 두었던 장면들이 생생하다. 특히 화창한 날 테라스에 앉아 선생님과 체스를 두던 때가 그렇다. 주말이면 체스를 배우려는 남자아이들로 집은 북적였고 그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경기를 코앞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래도 괜찮을 수를 두어 칭찬을 받을 때나 경기를 복기하며 실수를 알아가는 과정은 짜릿했다.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다른 학교에서 열리는 체스 수업에도 참석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나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체스는 여학생들에게 그리 인기가 좋은 과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달만에 포기했던 발레나 탭댄스와 달리 체스에는 애정이 있었다. 또한 체스에 꽤 오랜 시간 매달리며 노력을 들였음은 분명했다.


 선생님은 테네시 주에서 열리는 체스 대회에 나를 추천했다. 스스로의 객관적인 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던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가족들과 어디론가 주말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더 들떴던 것 같다. 부모님은 자주 내가 경기를 하는 모습을 관전했지만 나를 체스 영재로 만드려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회 전날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호텔방으로 불러 실전 연습을 시키는 등 혼신의 노력을 펼쳤지만 그날 밤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엘리자베스처럼 내 인생 첫 체스 경기의 상대 또한 여자아이 었다. 체스판에는 성별에 대한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그녀는 경기 전에 내게 선물이라며 연필 한 자루를 주었다. 하지만 정말 미안할 정도로 그녀를 빠르게 이겨버렸다. 빠른 시간 내에 그곳의 여자아이들을 경쟁 상대에서 제거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상대한 남자애는 결승에 올랐다. 조금 억울했으나 승률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 방 책상 위엔 작은 트로피가 하나 놓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 운이 좋게도 계속 체스 방과 후 교실에 들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체스에 흥미를 잃었다. 여전히 수업에서 여자아이라고는 나 하나였고 남아있던 흥미와 조금의 타고난 머리는 이 취미를 지속하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미술학원에 가거나 영어 학원을 다녔다. 그 가운데에서 체스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종종 내게 말했다. '체스 선생님은 네게 소질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의 상술이었을 거라며 웃어넘기지만 사실 그렇다. 그때 내가 체스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미국에 남았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졌을까 하는 일말의 후회도 남는다. 물론 내가 미국에서 체스를 더 배웠다 하더라도 엘리자베스처럼 체스 챔피언이 될 확률은 거의 전무하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을 배웠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는 끝까지 도전해보지 못 한 자의 슬픔이자 이른 포기에 대한 회한이다. 모든 조기 종영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드라마엔 체스를 포기하는 많은 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학업과 취업 그리고 현실과 마주한 많은 이들은 더 이상 체스에 인생을 베팅하지 않는다. 한 때 이름을 날렸던 이들도 현실을 자각하며 각자의 살길을 찾아 나선다. 베스의 첫 경기 상대이던 여학생 또한 지금은 체스를 그만두었노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들을 나무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체스보다 실재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달랐다. 수업을 땡땡이치면서 관리인에게 체스를 배워왔던 그녀. 머릿속으로 체스를 연습하기 위해 안정제를 먹어대던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체스를 사랑했고 체스가 주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베스에게는 자발적인 열정이 존재했다. 스스로 돈을 모아 체스 대회에 출전하던 무모함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체스를 했던 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체스는 돈이 되지 않는다고. 승자가 되지 않으면 인정을 커녕 경제적인 어려움을 떠안게 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픈 사실이다. 승자만을 기억하는 건 체스뿐 만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렇다. 보통 혹은 그보다 조금 우수한 머리로는 어떤 분야에서도 최고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실력이 언제나 노력과 비례하지도 않는 어려운 세상. 많은 이들이 꿈과 열정이 아닌 돈을 좇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는 분명 체스의 신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출중한 실력을 알아봐 준 학교 관리인이 있었고, 좋은 지도자가 있었고 함께할 동료와 어머니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체스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뛰어난 실력은 물론 주변의 잔잔한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챔피언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음에 있었다. 그녀의 목표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계속 도전한다. 트라우마로 가득한 상대와의 싸움과 연속된 패배에도 집념을 잃지 않던 그녀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승리를 거머쥔다.


  이 세상에서 엘리자베스들이 사라진 것은 당연하다. 대부분의 이들은 차별에 맞설 용기가 없다. 도전할 끈기도 나에 대한 믿음도 없다.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갖기엔 삶은 팍팍하고 포기는 너무도 쉽다.

 여성으로서 차별받는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실력으로 승부를 보고 인정받기까지 그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피나는 노력을 하고 숱한 좌절을 겪었을 테다. 그러나 그녀는 체스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실력 뒤에 가려진 그녀의 마음 가짐에 대해 생각한다. 고독과 불안을 이기고 유일한 존재가 된 엘리자베스. 체스 천재가 되지 못 한 나는 그녀에게서 강인한 생존력과 꾸준함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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