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고 나서 매년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코로나 때문에 중간에 강제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기회가 되면 나가려고 노력했다. 세어보니 가족이나 친구랑 간 것들은 제외하고 지금까지 11번 정도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누구랑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한 번 혼자 가보니까 괜찮아서 그 뒤로 주로 혼자 다니게 되었다. 누구랑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깡이나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 많은 쫄보에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편도 아니지만, 매번 떠날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혼여’의 장점들이 있다.
나는 J지만 빡빡하게 일정을 세우는 파워 J는 아닌지라, 꼭 가고 싶은 몇 개의 장소를 포함해서 큰 틀만 잡아 놓는다. 그렇게 막상 여행을 가면 갈 생각 없던 곳을 가기도 하고 반대로 가려고 계획했던 걸 취소하기도 하고 유연하게 일정을 조절한다. 또 하루 일과 중에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시 쉬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닌다. 타인에 대한 배려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이렇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부터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순간까지 크고 작은 사안에 대해 끊임없이 혼자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여행에 대한 기록이 하나씩 하나씩 쌓이면서 나의 성향과 취향을 알아가게 된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색채가 좀 더 뚜렷해지는 느낌이다.
친구나 가족과 가는 여행은 동행자와의 추억이 쌓인다면, 혼자 가는 여행은 예상치 못했던 낯선 이들과의 교류 같이 혼자였기에 생기는 에피소드들이 많다.
첫 번째 TMI 에피소드: 베트남에서 트래킹을 하는데 같은 코스로 가던 스페인 부부와 현지인 가이드 일행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코스가 끝날 때까지 같이 걸었다. 덩달아 설명도 듣고 사진도 얻어 찍으며 무섭지 않게 숲길을 헤쳐나올 수 있었다.
두 번째 TMI 에피소드: 호주 공항에서 짐이 도착하질 않자 옆에 있던 외국인 아저씨가 무슨 일인가 싶어 말을 걸었고 짐 찾을 때까지 대화를 나눴다. 출장으로 자주 온다길래 맛집까지 추천 받고(가진 못했지만)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대기 시간이었다.
이외에도 혼자 인증샷을 남기려 애쓰고 있으면 '사진 찍어줄까?' 하면서 도와주는 분들도 많았고, 혼자 투어 신청해서 만난 사람들과 그날 만큼은 여행메이트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혼자였기에 가능한 재밌는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들은 그 자체로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된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이것 저것 알아보고 준비하고, 여행을 가서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결정들이 쌓이면서 경험치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다. 태생이 쫄보라 매번 여행 갈 때마다 걱정과 불안이 새록새록 피어나긴 하지만,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나면 '혼자 알차게 잘 놀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혼여의 장소를 고민하면서, 언제든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주문서를 가슴팍에 꽂아둔 것처럼 든든함을 느낀다. 물론 시간이나 돈 같은 현실적인 제약은 배제하고 마음가짐의 측면에서다.
나는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여행을 가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낼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런 나 제법 멋져요.'라며 혼자 심취하는 경향도 있다. 무엇이 됐든 내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는 비타민 같은 존재이지 않나 싶다.
누군가와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지친 나를 돌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낯선 곳에서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온전히 내 마음의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혼자하는 여행. 나랑 친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