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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 | 기억의 골목을 지나는 법

군산 <이진표 베이커리><가야장><백화수복><동국사>








NBA 경기가 빠진 내 유년기를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 시절,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이어지는 농구의 황금기. 마이클 조던이 하늘을 날고, 아이버슨이 3점 라인 밖을 휘젓던 시대. 그러나 나는, 스포트라이트의 그림자에 조용히 서 있던 ‘팀 던컨’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갔다. 그는 화려한 드리블도, 격렬한 덩크도 없었지만, 묵묵히 골밑을 지키고, 경기의 리듬을 바르게 세우는 중심이었다. ‘기본기’라는 단단한 뿌리에서 자란 그의 꾸준함은, 나에게 신뢰와 존경의 또 다른 얼굴을 가르쳐주었다.


군산의 ‘팀 던컨’ 같은 곳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모두가 ‘이성당’이라는 스타플레이어를 말하지만, 나는 종종 그 앞을 지나쳐 웅성대는 사람들만 멀찍이 바라본다. 그보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동네의 시간과 숨을 함께 쉰 ‘영국빵집’이나 <이진표 베이커리> 같은 이름들이 마음에 남는다. 2024년, 그 베이커리는 옆 공간에 새 시즌을 열었다. 촌스럽다 할지 모를 비닐 포장지와 정직하게 부푼 빵은 오히려 군산사람들의 유년의 기억을 툭툭 두드린다. 마치 어릴 적 동네 문방구에서 고르던 스티커처럼.


이진표 베이커리 옆에 오픈런으로 들어간 중국집이 있다. 김치와 함께 건네받은 가위 한 자루. 기계적인 날카로움이 아닌, 손에 감기는 묵직한 그립감. 주어진 용도를 충실히 수행하는 그 도구가 낯설도록 정겹게 느껴졌다. 음식 맛의 반은 손맛이고, 또 반은 이렇게 엉뚱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가위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건 단지 도구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식당에 머문 기억을 손에 쥐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군산은 짬뽕의 도시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그 화려한 조명을 비켜간다. 지도 위에 조심스레 좌표를 찍어 찾아간 <가야장>이 그랬다. 반찬으로 내어준 겉절이는 하루를 시작하며 주인장이 손수 담근 것이라 했다. 반짝이는 속살을 드러내는 그 김치 한 점이, 이 짬뽕집의 품격을 말해주었다. 삼선짬뽕을 주문했다. 얼큰하고 칼칼한 국물은 혀를 자극하면서도 어느 순간 마음을 데운다. 호불호는 갈릴 수 있겠지만, 나에겐 꽤 성공적인 만남이었다.


추억의 술 한 병, ‘백화수복’. 이름마저 오래 살며 복을 누리라 말해주는 그 술은 명절의 제사상 위에서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킨다. 지금은 대기업의 이름으로 제조되고 있지만, 그 뿌리는 군산의 ‘백화양조’였다. 과거 위스키 시장의 선구자였던 이 회사는 ‘베리나인 골드’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시대의 물결은 고요히 흐르지 않는다. 순수 위스키 원액이 등장하자, 희석 위스키였던 베리나인은 순식간에 밀려났다.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 백화양조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폐허 위에 세워진 아파트 이름은 ‘현대오솔아파트’였다. 아파트 세워진 조형물 하나는 그 자리가 과거 술 향으로 물들었던 공간이었음을 속삭인다. <즐거운 하루>라는 제목 아래, 그 시절 여학생들의 교복이 모티브가 되었다. 조형물은 말없이 말하고 있다. ‘여기에도 이야기가 있었노라고.’


그 이야기는 때론 슬픈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 여고생의 죽음과, 그 죽음을 둘러싼 침묵. 세상의 이면은 늘 조용한 골목에 숨어 있다.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잊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군산의 조용한 골목을 따라갔다. <동국사>라는 사찰을 찾았다. 기와지붕과 나무기둥이 낮고 겸손하게 내려앉은 그 절은,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목조건물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으면서도, 오늘날의 햇살을 수용할 줄 아는 이 절은, 시간의 양 끝을 잇는 다리 같다. 법당 안에서 삐걱이는 나무 마루 소리마저도 한 편의 시처럼 들린다. 그 조용한 풍경 속에서, 나는 거창한 기념비보다 이 작은 공간이 더 깊은 울림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군산은 그렇게 조용한 이름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모두가 찾는 곳보다, 꼭 알려주고 싶은 장소들. 팀 던컨처럼 요란하지 않지만, 중심을 묵묵히 지키는 존재들. 사람의 마음도, 도시의 기억도 결국 그런 이름들로 채워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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