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주
제주에 두 달을 살러 갈 거라는 나의 말에, 사촌 언니는 대뜸 <백만엔걸 스즈코>라는 일본 영화를 꼭 보라고 했다. 자꾸 어딘가로 떠나려는 게 영화 속의 스즈코와 내가 똑 닮았다는 감상을 덧붙이면서.
<백만엔걸 스즈코>는 백만 엔을 들고 새로운 곳에 가서 아르바이트하며 생활하다가 다시 백만 엔이 모이면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스즈코의 일상을 담은 영화다. 그녀가 집을 떠나 다른 도시에 가게 된 건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전과자가 된 스즈코가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내가 졸업을 유예하고 제주행을 결심한 이유도 스즈코와 다른 듯 비슷하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 했달까. 그렇다고 집에서 놀고먹기엔 나 자신도 그리고 지켜보는 가족들도 답답해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 예전부터 꿈꿔왔던 게스트하우스 스태프가 떠오른 거다.
영화 말미에 스즈코는 동생 타쿠야의 편지에 오랜만에 답장한다. 이다음으로 지내게 될 곳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떳떳하게 살아보겠다면서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않겠다는 동생의 결심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온 스즈코가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바로 앞의 글 ‘대화가 필요해’에 그려진 그날의 대화가 타쿠야의 편지 같은 존재다. 안될 거라고 속단하며 도망쳐왔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어떻게 되든 한번 부딪혀보자는 대담함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