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붙어있다고 다 내 것이 아니다.
토요일 오후 5시.
잠실역에서 출발 한 열차는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신문 사설 한 페이지를 읽고 있자니 편협한 기자의 시선이 자꾸 보여 이런 것도 기사라고 썼는지 침을 뱉어버리고 싶었다. 잡다한 글로 헝클어진 머리와 마음을 씻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잔나비의 노래를 플레이시켰다.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한 마디씩 툭툭 뱉어내는 그의 노래는 속세에 때 묻어 타산적이 되어버린 내 머리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내 마음에 맑은 비를 뿌렸다. 그래 다 씻겨나가라. 그게 다 뭐라고.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마주 앉은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설마 그가 알아챘을까. 그를 보는 내 눈빛이 흔들렸다는 걸. 파도 끝에 부서지는 포말처럼 마음 한구석이 심하게 요동을 치며 부서져 내렸다.
그의 입은 영화 배트맨에 나온 죠커의 입을 연상케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참혹해 보였다. 군인들처럼 짧게 치깍은 머리에 옷자락 사이로 여윈 팔목이 훤히 드러나 보이던 그는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인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한쪽 입이 난잡하게 찢어져 있었고 반쯤 드러난 이빨은 흡사 분장을 한 것처럼 보였다. 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말로는 그 무어라 표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입술의 3분의 2가 없다고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단 한 번도 없다.
누군가는 내가 상상도 못 해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새삼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입술이 없다면 어떤 점이 가장 불편할까.
먼저 숨쉬기가 생각났다. 개폐가 확실히 이루어져야 할 입구가 훤하게 뚫려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뚫린 입구 사이로 세상 모든 먼지가 그대로 몸속으로 투과될 것이다. 말하기는 어떤가. 물론 혀에서 말이 시작되지만 완전한 소리는 입술에서 완성된다. 입술이 없거나, 있어도 딱딱하거나 하면 소리 전달을 잘할 수 없다 또한 음식물을 섭취할 때 입술은 음식물을 구강 내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 밖으로 새어 나와 삼시 세 끼도 제대로 먹지 못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감정표현이 어려울 수 있다. 보통 스마일로 인식되는 웃는 표정조차 입술이 없다면 상대방은 그의 감정에 반응을 할 수 없어 의사소통이 어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몰랐다. 이런 입술의 소중함을 말이다. 내 입술은 언제나 요 밑에, 내 코 아래 붙어있었으니 그 쓰임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 귀한 입술로 우린 매일 더러운 말을 담고 더러운 음식을 삼키며 잔인한 짓거리들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렇게 상대방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줄 도 모르고. 입술을 가진 고등동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 그건 입술에 대한 모욕이자 모독이다. 내 것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놀려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관념에서나 존재한다고 하는 지옥에서 입 찢김을 당할지 누가 아랴.
구의역에 다다라서 그는 찢긴 입술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지하철에서 내렸다. 보호용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게 좀 의아했지만 그 만의 사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현재 내 일상의 절반에서 장애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도 고개가 숙여진다. 입술 하나에도 천국과 지옥이 오가는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게 정말 뭘까.
신문을 다시 펼쳤다. 아 이 기레기들 진짜!! 편향된 정치적 목적성이 짙은 기사 따위에 또다시 울컥해 내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재빠른 스크롤 질로 약자의 편에서 사람의 마음을 보듬는 따뜻한 기사들을 찾아 눈을 파묻었다. 귀한 내 입술을 쓰다듬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