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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희 Jun 22. 2022

1. 동차반 환불해주세요.

공인노무사 시험, 짧고 빠르게 잠시만 손절하기.



  

  환불된 학원비가 들어왔다. 68만 원. 유예하고 유예했던 고민 끝, 결국 나는 올해 공인노무사 2차 시험을 포기했다.  




  남자 친구와 동거하기 위해 구했던 독산동 투룸 빌라 계약을 엎고, 결국 내가 향한 곳은 신림동 고시촌이었다. 2022년 2월부터 살게 된 고시촌은 단 세 음절만으로도 내 뱃속을 울렁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내 신분이 대학생에서 고시생으로 바뀐 것을 가장 크게 외치는 것이 바로 내가 살 동네였기 때문이다. 이사 오기 직전 내가 지냈던 곳은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동 시절의 나는 박력 있게 발을 움직여 연남동을 거쳐, 홍대, 상수 그리고 합정까지 돌아다니며 다양한 인간 군상 속 내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갔다. 힙스터,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 화려한 머리를 한 외국인, 단정히 차려입은 직장인, 취해 있는 사람들, 공부하러 나온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동네를 구성하는 곳이 바로 홍대다.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속할 수 있는 인간군상은 기껏해야 취해 있는 사람들 정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다른 인간 군상들을 더 바라보고 싶었다. 될 수 없는 존재들의 삶을 내 기억 주머니에 담아놓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하면 나도 그 사람들의 작은 조각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 동네를 누볐고, 사람들을 관찰했고,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했다.

 

  내가 걸린 병의 이름은 홍대병. 홍대병에도 다양한 증상이 있다. 가장 주된 증상은 '힙함'을 유지하기 위해 유행을 역행하며 살아가는 것. 예를 하나 들자면, 멜론 뮤직차트 탑100에 안착되어 있는 음악은 절대 안 듣고 '사운드클라우드'만을 이용해 음악 감상을 즐기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홍대병에 걸렸어도 멜론 뮤직차트의 음악들에 몸을 맡길 줄 알았다. 대신 나에게 발현된 가장 큰 증상은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홍대의 개성만점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그들처럼 될 수 있다고 자위하기 였다. 이 증상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에 있다. 덕분에 나는 타인이 일궈놓은 성과를 보며 질투를 느끼지도 못 했다. 나도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노력할 때라는 건 언젠가 운명처럼 다가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병은 대학 졸업 직전, 갑작스럽게 완치되었다. 드디어 내가 '자기객관화'라는 것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미디어과를 졸업했음에도 이렇다 할 스펙 하나 없었다. 심지어 SNS에 글 하나 올려본 적 없었다. SNS계정이라곤 고등학생 때 게임 '심즈'에서 만드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든 페이스북 계정 하나가 전부인 미디어과 학부생. 그 당시의 나는 미디어학을 배우는 대학생이라기 보단 V-log, SNS 염탐이나 할 줄 아는 관음증 환자에 가까웠다. 나를 드러내는 것에는 익숙지 않은 주제에 다른 사람의 삶은 무람없이 훔쳐보는 사람, 그게 나였다.


  홍대같이 사람들의 시선이 널린 곳에서도 신나게 사람들을 훔쳐보았는데 눈치 볼 일 하나 없는 온라인 세계에서는 어땠겠는가. 당연하게도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서핑하며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 보는데 맛들리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과생 대부분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를 꿈꾸는 과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 했다. 나는 꾸준히 훔쳐보기만 하고 싶었다. 훔쳐보기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인생, 내 이야기는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남들에게 선보일만한 콘텐츠를 만들기에는 나는 평범에도 미치지 못 하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결국 내 최종 스펙은 누군가 장난질을 해놓은 듯한 3.98라는 학점과 스펙이라곤 토익점수, 한국사 시험 점수 뿐. 미디어 콘텐츠의 세계에서 나는 존재가치가 없었다. 수상경력도 없고, 대외활동도 안 해본 데다 SNS 운영도 안 해본 미디어과 학생을 원하는 기업은 없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취준을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예전에 아빠가 제안하셨던 노무사 시험을 준비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당연히 노무사에 대한 간절한 꿈은 없었다. 그저 빨리 주변 사람들 특히, 부모님께 내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시험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천국은 없다더니, 무턱대고 들이댄 수험판은 내 생각보다 더 진흙탕이었다. 공부가 재미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법학 과목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의 폭이 넓어져 지식의 양이 풍부해지는 것이 체감됐다. 인강 선생님들도 잘 맞았다. 그런데도 공부를 끝내고 나면 그냥 계속 눈물이 났다. 정신과에 초진을 받기 위해선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병원에 찾아가기도 했다. 밤에 공부를 마치고 누우면 내일도, 한 달 후도, 어쩌면 몇 년간 이렇게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이라는 압박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식욕도 없었고 뭘 먹어도 속이 메슥거려 하루 한 끼, 시킨 음식의 1/4을 먹는 수준에 그쳤다. 


  이 두려움과 우울함의 원인은 다름 아닌 합격한 이후의 내가 너무 불행할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합격 수기들을 읽어보면, 공부가 힘들 때마다 합격하는 순간을 생각하며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정작 나는 합격의 순간만 떠올리면 숨이 턱 막혔다. 좀 더 창의적인 일, 내가 과에서 배웠던 일들로 돈을 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 내가 법 조문과 판례 속에서 헤엄치고 있어야 하지? 왜 나는 아무것도 시도해보지도 않고 내 미래를 결정했지? 왜 나는 아무것도 도전해보지 못했지? 끊임없는 '왜'가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후회와 미래에 대한 근심,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 섞여 무작정 나를 괴롭혔다. 이 시기에는 공부하는 날보다 머리를 싸매고 운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곧 현실을 직시하긴 했다는 것이다. 나의 우울은 뭐 하나 제대로 시도해보지 않은 대학생활에 대한 후회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노무사 1차 시험마저도 접수 다 해놓고 응시조차 안 하면 이것도 나중에 큰 후회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우울해도 일단 내가 투자한 만큼은 하자. 인강도 결제했고, 민법도 총칙 일 회독 끝나가니까 계속해보자. 합격이 됐든, 불합격이 됐든 일단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어보고 다시 고민하자. 결국 고민을 유예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고민에게도 재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자 다행히 머릿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주었다. 수험판에서 강제로 탈출하기 위해 내심 불합격을 바라면서도 유예를 결심한 순간 이후만큼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공부와 우울로 점철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시험 날인 동시에, 꼭 닫아놓은 고민 상자가 열릴 5월 14일이 되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올라온 답안지로 채점을 했고 공인노무사 1차 시험에서 합격 점수가 나왔다. 그날의 나는 고향에서 올라온 엄마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막상 시험이 끝나자 고민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한 과목당 답안지 약 16페이지 정도를 써내야 하는 노무사 2차 시험은 진입장벽이 높다. 때문에 고시촌의 학원들은 1차 시험이 끝난 후 2차 시험이 치러지기 전 약 2개월의 시간 동안, 2차 시험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이 답안지의 개괄이라도 잡도록 도와주는 '동차반'을 개설한다. 나는 흐지부지한 고민 끝에 이 동차반에 등록했다. 모아둔 돈으로 학원비와 교재비를 내고 나니 허탈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할지 방법도 모르겠고, 두려웠고, 게을렀다. 부모님 역시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셨지만 갈팡질팡하는 딸에게 조언을 내놓진 못 하셨다. 나조차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말하지 못하니 항상 부모님의 결론은 '그래도 전문직 하나 따 놓으면 남은 인생이 정말 편할 거야'로 귀결됐다. 게으르게 울기만 하며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나는 또 한 번 후회할 길로 향했다. 


  동차반 개강 딱 하루 전인 일요일. 그전까지 우울하게 시간만 죽이다가 하루 전이 되자 정말 미친 듯이 불안해졌다. 단단하게 싸매지 못한 고민의 박스가 다시 열려 또 뒤집혔다. 공모전 한 번 나가볼걸, SNS도 스펙이라는데 운영해볼걸, 끄적였던 영화 감상문들 브런치에 저장이라도 해둘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싫어서 유튜브 속에 파묻혀 지낸 일요일 오전, 내 답답한 마음을 해소라도 하고 싶어 핸드폰 녹음기를 실행했다. 


  내 생각을 내가 제대로 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뱉은 말을 내가 이해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녹음기에 대고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횡설수설이었지만 지금 나의 감정, 상황, 실패의 원인들을 나불거리니 신기하게도 녹음을 하는 동안 마음속 심지가 똑바로 세워졌다. 순간적으로 지금의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나를 위해 내린 결론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2개월 간의 시간을 주려고 한다."




  7월과 8월 두 달간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제 녹음한 내용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을 타임랩스로 찍어 영상을 하나 만들었다. 대학 입학 전에 산 노트북은 이제 프리미어 같은 고사양 프로그램은 돌릴 수 없는 기계가 되어버렸기에 급한 대로 생소하디 생소한 아이패드의 루마 퓨전으로 영상 편집을 했다. 촬영은 핸드폰에 셀카봉을 연결해서 했다. 세수도 하지 않은 그냥 내 모습을 담았다. 루마 퓨전의 모든 버튼을 눌러보며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식으로 영상을 완성했다. 처음 써보는 프로그램으로 끙끙대다 보니 하루 종일 편집해 5분짜리 영상이 완성됐다. 그런데 너무 재밌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편집에 매달렸다. 이전에 나는 편집 프로그램이 안 돌아가서 안된다며, 핸드폰 카메라가 화질이 안 좋다며,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따위들로,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미뤄왔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창작품을 보고 감상하고 싶었다. 감상이 가져오는 짜릿함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 창작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작디 작은 감정이라도 선물하고 싶었다. 보는 사람들은 결국 직접 카메라를 들고, 읽는 사람들은 결국 본인이 펜을 든다. 

  

  공모전을 찾았고, 인스타그램을 개설했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기 위한 글을 써 본다. 프로크리에이터로 인스타툰도 그려봤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한다. 영화와 책에 관련된 글도 써보고 싶고 그림도 그려보고 싶고 영상편집도 잘해보고 싶고 공모전도 나가보고 싶다. 두 달 후 내가 다시 수험판으로 뛰어들지, 지금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지, 취직을 준비하게 될지, 혹은 다른 시험을 준비하게 될지 다시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어쨌든 뭔가를 하고 있다. 뭔가를 그냥 '하기'가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다. 늘 생각뿐에 그쳤다. 앞서 말한 말도 안되는 이유들 때문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시작했다. 



일단 오늘 아침 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던 학원에 도착해, 데스크 직원에게 부탁했다. 

  "저 동차반 환불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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