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 말하기 모임
아이들이 놀다가 서로 다투고 다치는 일이 많아졌다.
싸우는 것을 말리는 것도, 싸우기 전에 미리 제지하는 것도
어렵고, 잘 되지 않는다.
다쳐서 속상하고,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 반복되다 보니
평정심을 가지고 이야기하기가 나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다.
열흘 전 6살이 된 둘째 아이는 말보다는
눈물로 호소하는 일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잘 울고, 많이 울고,
크게 울었던 아이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 없겠지만,
나에겐 우는 ‘소리’ 그 자체보다
엄마이기 때문에 주어진 ‘의무와 책임’
아이를 달래고 그치게 할 의무와 책임이 나를 힘들게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고
달래지 못한 책임은 부모에게 있으니까.
실제로 밤 9시 넘어 터진 둘째의 큰 울음이 달래지지 않아
'하, 나도 모르겠다.' 하고 넋 놓고 있던 어느 날 밤.
정말로
우리 집에 경찰관이 찾아왔다.
이웃 주민의 신고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사실 확인 후 보고해야 한다면서.
이웃 주민은 혹시 아동학대가 아닐까 생각하셨던 듯하다.
현관에서 남편이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하는 동안 나는,
경찰관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실 때까지 차마 방에서 나가지 못했다.
아이의 울음을 달래지 못한 나의 부족함.
울음을 방치했던 무책임함.
부끄러웠다.
이 상황이 되기까지 내가 한 행동을 나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럴 순 없었다.
경찰이 우리 집에 오도록
나는 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부족함을 숨기고만 싶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정기적으로 만나서
나의 부족함을 이야기하게 되는 모임이 있다.
‘부족함 이야기하기 모임’은 아니다.
원래의 주목적은 무엇을 배우거나, 특정 활동을 위한 모임인데,
모임 중간이나 마칠 무렵이면 누군가 슬쩍 그런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실은 오늘요, 라거나
저 사실은 요즘요, 로 시작하는 어떤 어려움, 고민을.
마음 안에 꽉 들어차서 빼내지 않으면 터질 것만 같은 답답함.
누군가와의 갈등, 힘들었던 일, 고민되는 일이 그렇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 공간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다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단단히 걸어둔 내 마음의 빗장이 무장 해제된다.
내 안에 가득 찬 무언가를 퍼내기 위한 마중물이 들어오면
저도 그래요. 저도 그랬어요. 저는요, 하며
비슷한 부족함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처음 열어 보인 누군가의 ‘부족함’이
나의 ‘부족함’을 밖으로 나오게 한다.
왜일까.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빠지고,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누군가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
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힘들었겠어요 정말.
이해 안 되는 어려움이 없었다.
모두의 어려움은 그 나름의 배경과 설득력이 있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알고 있다.
그 너그러운 기준이 스스로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생각해본다.
경찰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던 그 시간
나는 나에게 너그럽게 대하지 못했다.
자책했고, 단죄했다.
이럴 순 없다고, 엄마면 이럴 순 없는 거라고.
글 쓰는 모임에서, 그림책 수업에서
나는 나의 부족함, 실수, 잘못하고 후회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눈물이 나고 목소리는 떨렸다.
이야기를 듣던 분들의 깊은 눈빛, 끄덕이는 고개
촉촉해지는 눈가, 다정한 목소리가 내게
괜찮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엄마는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없었던 말.
실은 내게 필요했던 말.
정말 듣고 싶었던 말.
어쩌면 이 말을 듣기 위해
모임을 열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의식적으론 대외적 활동을 위한 모임임에 틀림없지만,
내 무의식 안에서 끊임없이 나에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듣고 싶어, 말하고 싶어.
내 부족함을 말하고,
그 부족함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고
내게도 충분히 이해될 만한 배경과 설득력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