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째 어린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두 어린이들은 에너지가 넘치다가도
전적으로 엄마 사람에 의지하는 약한 존재이기도 하고,
미숙한 말과 행동을 하다가도
어느 때는 엄마 사람으로 하여금 깜짝 놀랄 명쾌한 답을 주기도 하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알겠는.
'안다'라는 것이 때론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어린이들과 지내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세상에 처음 나왔던
그 모습을 알고 있어서일까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울음뿐인
너무나 약한 존재로 태어난 아이들.
전적으로 부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부분을 제가 도와주었기 때문일까요?
어린이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하나의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것이.
나와 다르지 않은 하나의 고유한 인격체로 대한다는 것,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요.
안전을 이유로 통제하고 억압하고
심지어 위협을 서슴지 않는 엄마 사람의 일상에서
가끔 어린이들의 말에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보통은 엄마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잠시 이성을 잃었을 때.
어린이의 놀라운 직감으로 건넨 한마디 말에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동생이 떼쓰며 울고 있을 때,
달래다 지쳐 내버려 두고 있으면
형아가 조용히 말해요.
"안아달라는 거예요."
방금 안아주다가 발로 차고 거부하기에
내려놓고 어쩌라는 거냐 심정으로 도끼눈을 뜨고 있는 참인데도
첫째 어린이가 그럽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 슬그머니 안아주니
왕-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안기는 둘째 어린이.
예전에는 지시문이 대부분이었다면
그 이후 어린이들에게 자주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정말 엄마가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라는 전제 하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물어보면
어린이들은 그들의 투명한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
결정한 신중한 의견을 전해줍니다.
가끔은 어린이들도 모르겠다는
난감한 상황도 있기는 하지만요.
엄마의 시선에서 보지 못한,
혹은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어린이들은 엄마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나에게 보내진 존재가 아닐까 하는.
처음 아이들이 우리에게 왔을 때,
작고 소중한 이 존재들을 잘 보살피고 홀로 설 수 있기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노라 다짐했었는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 부모들이 더 나은 부모 혹은 한 인간이 되도록
나름의 임무를 가지고 와준 것이 아닐까 하고요.
더 많이 살았다고 더 나을 것도,
살아온 날이 그보다 적다고 더 부족할 것도 없는
정말 대등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안에서 취해할 할 삶의 태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주의할 것.
가장 쉬운 방법은 어린이들과 대립하는 상황일 때
이 어린이를 어른으로, 손님으로 상상하고 대하는 겁니다.
적어도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대합니다.
저도 사회적 체면은 챙기고 사는 표면적으로는 어른이니까요.
여전히 주의를 합니다만,
어제도 같은 패턴으로 어린이에게 조언을 들었습니다.
'안아달라는 거예요'
표면적 어른은 겸연쩍어하며 얼른 안아줍니다.
서로 돕는 관계.
어린이와 어른 이전에 사람과 사람,
존재와 존재의 관계.
그 도움에 부끄러워하기보다
고마워하기로 합니다.
어제보다
조금은 더 좋은 어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