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온 편지

독일에서 만난 한일 친구가 주고받는 엽서의 기록

by 계피

'아야노'와 처음 만난 건 2023년 가을이었다. 교환학생으로 독일 니더작센주의 작고 조용한 도시 괴팅엔(Göttingen)에 막 왔을 때였다.

괴팅엔의 고요한 풍경

정규학기 시작 전, 독일어 실력을 키울 요량으로 유학생들이 듣는 독일어 어학 코스를 신청했다. 학교에서는 수강생들을 단체로 데리고 두어 번 나들이를 갔는데, 그때 다른 반 학생이던 그를 처음 봤다. 나는 B1반, 그는 한 단계 높은 B2반이었다.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첫눈에 느꼈다. 아야노의 가방은 무척이나 화려했는데, 무지개 리본부터 "Vote for Feminism"이라고 쓰인 보라색 배지, 히잡을 쓴 여성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그림과 함께 알아볼 수 없는 한자가 쓰인 배지까지(나중에 알고 보니 '이민자 차별 반대'라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주렁주렁이었다.


일본인 운동권이라니! 흥미가 끌어 올랐다. 당시는 내 삶에서 가장 '투쟁적'인 시기였다. 나는 독일에 오기 이틀 전까지도 후쿠시마 핵오염수 투기 반대 집회와 기자회견 현장에 있었다. 정말이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야노를 처음 본 나들이에서 돌아온 뒤, 내 가방에도 배지를 달았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배지를 다는 일은 리스크를 동반하므로 떼어둔 참이었다. 나는 독일에 사는 동양인 여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취약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조심히 가방에 달았다.


폐광산으로 나들이를 간 날, 우리는 비로소 친구가 됐다. 좁고 가파른 광산에 들어가기 전, 가방을 보관함에 넣었다. 가방 수에 비해 보관함 개수가 적었으므로 한 보관함에 가방을 여러 개 넣어야 했다. 그때 눈이 마주쳤고, 아주 자연스럽게 보관함에 가방을 같이 넣자고 얘기했다. 마치 원래 알던 사람처럼.


그렇게 친구가 된 아야노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각자의 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큰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지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고, 수업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옹호하는 교수를 욕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눈 오는 날엔 기숙사에서 일본식 오뎅을 만들어 먹고, 시내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에도 함께 나가며 우리는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함께했다.

시내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우정은 계속됐다. 지금도 왓츠앱과 엽서를 주고받으며 마르지 않는 대화를 나눈다. 대화는 늘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개인의 삶에서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와 대화하는 매 순간 깨닫는다.


이 불온한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가 너무 즐겁기에, 둘 사이의 이야기로 남기기엔 아까웠다. <멀리서 온 편지> 시리즈는 일본인 친구와 주고받은 엽서와 대화를 기반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우리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이 연재를 통해 글을 봐주시는 독자 여러분과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