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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에날린 Jan 07. 2021

일본의 위대한 세균학자, 기타자토의 굴욕

페스트균 발견을 두고 일어난 해프닝


일본은 새로운 레이와 시대를 맞아 2024년부터 지폐의 도안을 바꾼다고 합니다. 천 엔짜리 지폐는 한동안 노구치 히데요라는 세균학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닥터 노구치라는 만화로 한국에도 유명한 분이죠. 반면, 천 엔권의 새 얼굴마담이 될 세균학자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理柴三郎, 1853~1931)에 대해서는 의외로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어찌 보면 과학적 발견 면에서는 노구치보다 기타자토의 업적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는데도요. 그러나 일본의 자존심 기타자토 씨에게도 굴욕적인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인류가 과거 아직 세균을 정복하지 못했던 19세기 이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측 하단이 기타자토


페스트 하면 우리는 흔히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을 생각합니다. 흑사병은 경직되었던 유럽의 중세 사회를 뒤흔들어 르네상스를 불러오는 돌다리가 됩니다. 그 이후 역사적으로 여러 번의 페스트 집단감염이 퍼진 바 있습니다. 뉴턴도 1664년 런던에 퍼진 페스트 때문에 고향에 내려간 사이에 만유인력의 원리가 담긴 프린키피아를 저술하지요.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달 전에도 중국 내륙 네이멍구 자치주에서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도 납니다. 다행히도, 페스트균은 항생제를 쓰면 금방 죽기 때문에 옛날과 달리 인류 보건에 있어 큰 문제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 질환이나, 포도상구균, 대장균 등의 항생제 내성이 더 큰 문제죠.

역대 페스트 판데믹 중 1894년 홍콩에서 시작한 페스트는 규모가 커 역사적, 의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홍콩 페스트는 마카오, 타이완, 인도, 미국, 호주까지 퍼졌고, 치사율은 90%에 달해 무려 2천2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때 원인 병원체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 1863~1943)과 일본의 기타자토 시바사부로가 홍콩으로 파견된 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기타자토는 당시 파상풍균을 발견하고 디프테리아 항독소를 개발했으며, 후에는 Shigella라는 이질균을 발견하는 등 이미 세계적인 세균학자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31세의 젊은 예르생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광견병 항체와 디프테리아 독소를 발견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미 전 세계적 스타였던 기타자토만큼 명성이 자자한 인물은 아니었죠.

홍콩에서 사람들이 페스트로 죽어나간다는 소식을 알게 된 영국 식민 당국의 방역 담당관인 제임스 로손(James Lowson)은 6월 12일에 홍콩에 도착한 기타자토를 크게 환영하여 일방적으로 그를 지원하였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학자였던 기타자토가 페스트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로손은 기타자토에게 페스트로 사망한 시신 한 구를 부검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준 반면, 그보다 3일 뒤 홍콩에 찾아온 예르생은 냉대하였습니다. 페스트의 원인에 대해 알아서 스스로 잘(...) 조사하라는 얘기를 했을 뿐이죠. 두 과학자에 대한 대우의 차이는 아래 예르생이 묵었던 숙소의 사진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르생이 페스트균을 연구했던 초가삼간.


기타자토는 홍콩에 도착하고 단 이틀 만에 부검한 시신의 혈액과 내부 장기에서 페스트를 유발하는 막대 모양의 균을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논문은 영국의 의학잡지 Lancet에 보고되었으며, 그는 스스로 이 균에 Kitasato pestis라는 학명을 붙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미 유명한 세균학자였던 기타자토의 발견에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곧이어 기타자토의 방식으로 사체에서 세균을 배양하는 실험을 했지만,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연구가 다른 실험자에 의해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실험 설계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홍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균은 선페스트(bubonic plague), 즉 림프절에서 증식하는 종류였습니다. 따라서 혈액에서 페스트균이 배양되기는 어려웠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기타자토의 방법에서 균이 검출된 이유는 그가 실험했던 시료가 오염되었던 탓으로 추측합니다.


기타자토가 균을 발견한 6월 14일로부터 9일 뒤, 예르생도 독자적으로 페스트균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기타자토와는 달리, 예르생은 감염자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 있는 림프절에서 균을 분리 배양하여 발견하였습니다. 예르생의 방법이 결과적으로는 옳았으며, 결국 페스트균 최초 발견의 영광은 예르생에게 돌아갑니다. 예르생은 흔히 거만한(?) 과학자들이 그러듯이 발견한 세균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자기가 몸담았던 파스퇴르 연구소의 이름을 붙여 Pasteurella pestis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학명은 1967년에 재분류 과정에서 예르생을 기념하기 위해 Yersinia pestis로 학명이 바뀌었고,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알렉상드르 예르생

반면, 이후 대만이나 일본에서 페스트가 계속 발생할 때 기타자토가 활약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굴욕적인 과거로 인해 기타자토는 일본 정부로부터 견제를 받습니다. 결국 기타자토는 학계에 논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문을 올린 후에야 복권됩니다. 일본 생물학계 최고 거두에게 일어난 일 치고는 굉장한 굴욕인 셈이지요. 


2024년부터 만 엔짜리 신권에 실리는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대해서는 한국 웹에서 여러 비판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기타사토는 그냥 과학자로 활동했다~ 라는 데에서 논의가 그치는 경우가 많아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해 봅니다. 그나저나 일본 지폐에 쓰이는 인물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 한국에서 논란인 인물이 되게 많네요.


참고)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굉장히 없어 보이지만, 기타자토 시바사부로는 사실 일본인 최고 아웃풋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프테리아 항독소 혈청을 연구해 1901년 최초의 노벨 생리의학상 목전까지 갔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노벨상은 그와 협업한 막스 폰 베링에게만 주어졌는데, 일각에서는 동양인에게 노벨상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합니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요.


참고2)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쳐 보면 검색 결과로 기타자토와 기타사토가 섞여서 나옵니다. 원래 일본 이름은 기타자토이지만, 그가 독일의 코흐 밑에서 공부할 때 이름을 독일식으로 Kitasato로 쓰던 게 외국에 오히려 역수출되어 기타사토로 알려졌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Shin Kyu-Hwan, Reorganizing Hospital Space: The 1894 Plague Epidemic in Hong Kong and the Germ Theory, Korean J Med Hist: 59-94 Apr. 2017

신규환, 페스트 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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