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에날린 Dec 28. 2022

Road not taken

이제 연말이고 인턴도 거의 끝났다.


동네 아르바이트와 시급이 비슷한 이 직업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할 만했다. 일단 주 8~90시간씩 일하니까 월급이 꽤 괜찮다. 저녁, 밤, 주말에 각각 50%씩 가산수당이 붙는다. 즉, 최저임금으로도 주 80시간 일하면 꽤 많은 저축을 할 수 있다. 또, 의사로서 병원에서 일하면 일단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대해 준다는 점이 참 좋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 알바에게 특별히 친절할 이유는 없지만, 병원에서 가운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면 환자들은 '아, 저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똑같은 일을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는다는 점이 참 좋다. 엘리베이터도 잘 잡아준다. 우리끼리야 인턴 나부랭이라고 말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선생님이다. 다들 고생하기 때문에 환자, 간호사, 전공의로부터 여러 먹을거리도 받고 많은 추억도 쌓았다. 물론, 다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큰 병원에 있으면 다양한 케이스를 보게 된다. 기상천외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열 명 넘는 변비 환자의 똥을 손가락으로 팠고, 멀쩡히 잘 얘기하던 사람이 다음날 돌아가시는 것도 봤다. 깡패한테 맞을 뻔한 적도 있고, 불만사항을 인터넷에 올리겠다는 환자를 본 적도 있다. 새벽 동안 4번 CPR이 터지기도 했고, 마취 중 환자가 꺨 뻔한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을 처음에는 흥미로워했다. 바위에도 내가 겪었던 케이스들을 여럿 올렸다. 한 6~7월까지는 간병인과, 환자와, 보호자와 얘기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좀 자고 싶다. 케이스를 일기로 남기는 일도 뜸해졌다. 물론 당직 적응도는 좀 높아졌다. 이젠 전날 당직을 서도 다음날 되면 거뜬히 일할 수 있다. 전공의시험 직전에는 전날 당직 서고 그 다음날 퇴근해서 공부하고 자고 그랬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가슴통증이 있대도 아 그렇군요, 누가 아프대도 알겠습니다, 하고 눕고 싶은 생각이다. 결국 나는 사람의 치료보다는 병을 알아감에 더 큰 관심이 있지 않았나 한다.


인턴 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병을 아는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병의 원인, 경과, 치료를 아무리 잘 알아봤자 직접 경험이 없으면 절대 치료 못한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누가 가족의 병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도 대답하고자 노력하지만, 치료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 이상의 도움은 되지 못한다. (물론 널리 알려진 얘기라도 의사에게 컨펌받는 것이 일반인 입장에서는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흥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흥미는 있지만, 버티기가 어렵다. 몸으로 뛰면서 사람을 살리는 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좀 부담스럽다.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사람 살리기는 내가 감히 넘보지 못할 숭고한 업이다. 인턴 동안 전국 최고 블랙병원에서 헬당직을 서면서 그 참맛을 충분히 엿보았다. 환자는 어떻게 보는 건지, 1년 동안 잠깐의 산책을 왔다고 생각해야겠다.


나는 현장보다는 책상 체질이다. 공부를 하는 건 자신있다. (공부를 잘하는 것에 자신 있다는 얘기는 아님에 유의하라.) 그리고 영상의학과는 신체 모든 계통을 깊게 공부해야 하는 과다. 그래서 제너러럴리스트를 추구하는 나는 오장육부 신체 모든 곳의 병에 대해 주구장창 공부해야 하는 영상의학과를 학생 때부터 지망했었다. 물론 영상의학과 좋은 건 다 안다, 그래서 경쟁이 덜 치열한 강남세브란스 영상의학과에 지원했었다. 그런데 거기가 경쟁이 더 치열했던 거다. 그래서 떨어졌다. 그리고 신촌에 썼는데 붙었다. 강남에서 떨어진 것이 내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신촌이 익숙하고, 병원도 신식이고 좋다. 또, 난 힙스터로서 강남보다는 강북 체질에 맞다.


5월달엔 정형외과 인턴을 돌았다. 3년차 샘이 나보고 어디 가고 싶냬서 영상의학과라고 대답하니,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고 한 적이 있다. (주의: 정형외과 의사가 문학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분 역시 과를 정할 때 영상의학과를 고민해 본 적이 있고, 그렇게 됐다면 지금의 자신과 정반대의 삶이겠지만 그 역시 참 좋았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미래엔 반대로 내가 가지 않은 '환자 보는 삶'을 그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하기로 한 이상 해 보는 거다. 적성과 흥미에 맞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한다. 나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안에 들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 실제로 해 보면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일본의 위대한 세균학자, 기타자토의 굴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