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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Zorba Jun 07. 2018

첫째의 '둘째 맞이'

(13) 첫째와 둘째사이_엄마

1. 엄마의 '첫째앓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체온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열이 38도에서 39도 후반을 오가다, 40도 이상까지 여러 차례 이르렀다. 아이 생후 처음 보는 수치다. 아이는 고열을 견디다 힘겨워 자주 울먹였다. 불덩이 아이를 안고있는 엄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살면서 지은 죄가 있다면 내 죄 값을 이렇게 다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잘 먹던 아이였는데, 얼마나 괴로운지 좋아하던 비타민 캔디마저도 바닥으로 던졌다. 배운 줄도 몰랐던 말 “안 먹어. 안 먹어.” 라는 말을 곧장 내뱉었다. 본능의 말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었나 보다.

     


 이렇게 ‘첫째에게서 둘째에게로 향하는 시간의 길목’에서, 첫째가 아팠다. ‘엄마 아직은 나한테 마음 놓지 마세요.’하는 어떤 신호였을지도. 웬만한 말은 다 알아듣고 반응하기 시작한 17개월의 첫째는 이처럼 눈빛으로 내게 많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돌 이전까지는 모체로부터 받은 면역력으로 거의 아프지 않던 아이들도, 이맘때가 되면 아프게 마련이라고들 했다. 그럼에도, 둘째 맞이 준비를 해야하는 엄마 입장에서, 아픈 첫째는 그저 애잔했다.      


 다행히 나는, 두 아이 임신기간 동안 입덧이 거의 없는 임산부였다. 대신 임신 초기와 후기 졸음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임신 후기인 35주에 접어들자, 길을 걷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곧장 기절할 듯 잠이 쏟아졌다. 10kg이 넘는 첫째를 들었다 내렸다 하다 보니, 배가 뭉치는 것 같기도 했고, 허리가 저릿저릿 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출산 마지막 주는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여유있게 출산가방을 싸고, 낮잠도 푹 자고, 밀린 빨래며, 두 아이의 옷장 정리도 느릿느릿 하려 했다. ‘네 식구 살이’가 본격 시작되기 전에 크게 심호흡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던 것. 물론 첫째가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사이, 나는 간만에 음악도 듣고, 책도 여러 권 읽고, 아이를 등/하원 하는 길에서 봄바람도 느껴 보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얼마간 가졌었다. 이렇게 내 시간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엄마의 속을 들키기라도 한 듯 첫째가 아프기 시작하자, 그게 다 내 탓 같았다.  아이를 둘 이상 둔 엄마들에게서 자주 듣던, "첫째를 생각하면 늘 애틋한 마음이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2. 둘째를 만나기 전 일주일


 둘째가 우리 곁에 오기 전 일주일은 가족에게 특별한 시간이었다. 첫째는 41주 2일을 꼬박 기다려, 유도분만 시도 후 예기치 않은 시간에 수술로 만났다면, 둘째는 가족들에게 가장 편안한 시간에 맞춰 출산하기로 했다. 출산 두 달 전부터 가족이 각자 스케줄표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 택일했다. 첫째를 주로 보살펴줄 친정어머니와 남편이 되도록 휴가를 덜 쓸 수 있는 때를 맞췄다. 그럼에도 그 최상의 시간표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첫째가 아플 수도 있다는 가정이었다.      


 둘째 출산 일주일을 앞둔 새벽, 첫째는 40도를 넘나드는 고열에 시달렸다. 둘째 출산 후에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아 첫째를 데리고 외식을 다니고, 동물원도 가고, 저녁산책도 잠깐씩 했었던 지난 한 주가 주마등처럼 스치며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어린이집에서도 아이들에게 봄날을 느끼게 해주려 산책을 데려나갔던 지난 한 주, 사진속의 첫째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닐 테지만, 미리 조심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책망해 보아도, 때는 이미 늦었다. 만삭의 몸으로,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약을 잘 쓰기로 유명한 소아과에 아이를 데려갔다. “많이 부었네요.” 의사는 하얗게 자리한 염증을 보여주었다. 목감기라 했다. 의사는 첫째가 약을 먹어도 열이 쉬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해열제를 교차투약 하면, 겨우 열이 잡혔다가도, 안심할라치면 어느새 다시 열이 나곤 했다. 첫째는 어린이집에 못 가고, 만삭인 엄마와 함께 일주일을 지내게 됐다.    

  

 열이 쉬이 떨어지지 않자, 첫째는 생후 처음으로 링겔주사를 맞았다. 길다란 주사바늘이 자기 팔에 깊숙이 들어가는 걸 보고 너무 놀랐던 첫째. 염증 수치, 백혈구 수치 등을 검사하기 위해 ‘피를 충분히 뽑으라’는 주치의의 지시대로 두 번째 주사바늘이 또 아이의 팔목을 파고들자, 첫째는 울음을 터트렸다. 병원에서 돌아와 밥을 먹다가도 간호사 선생님이 붙여준 캐릭터 밴드를 보며,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손등에서 캐릭터만 봐도 훌쩍훌쩍 울었다. 자다가도, 바늘주사를 맞았던 기억이 났는지 평소와 달리 분통을 터트리듯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링겔을 맞은 뒤에 아이는 열도 내렸고, 콧물도 금세 말랐다. 하지만, 이후에 아이는 기력을 잃고 축 쳐져서 계속 졸고, 몸이 괴로운지 자주 울었다. 인생을 다 경험한 듯한 표정이 아이에게서 보였달까. 전에 없던 감정들이 아이 얼굴에 스쳤다. 열이 내리자, 등이며 복부에 꽃이 피었다. 돌발진 이었다. 얼마나 아팠던 걸까. 어린이집에 보내서 이렇게 된 걸까. 태어날 둘째 아이만 생각하며, 내가 부모로서 첫째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일까. 돌이라도 삼킬 기세로 잘 먹던 첫째가 물도 겨우 삼키는 것을 보니 어미 맘이 찢어졌다. 안아 달라고 전혀 보채지 않던 아이였는데, 안아 달라고 수시로 보채니 마음이 아팠다. 만삭의 몸인 엄마라 맘껏 안아주지 못 하니, 그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안아주는 대신 온몸이 불덩이인 채로 우는 첫째를 달래느라 포대기로 들쳐 업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이를 업을 수 없을 것 같아, 진작부터 업어 재우는 대신 ‘함께 누워 잠들기 훈련’을 해온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여유있게 출산준비를 하려던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첫째는 나을라치면 다시 열이 오르곤 했다. 출산 당일까지 아이는 어린이집에 계속 못 갔다. 결국, 출산 당일, 남편은 첫째를 데리고 오전에는 소아과행, 오후에는 산부인과행을 강행해야했다. 나 역시 출산 당일 급히 출산가방을 꾸려 병원으로 향했다.      


 계획이 어긋나서 힘들었다기 보다는, 첫째가 아픈 중에 내가 출산을 하러 간다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첫째가 하루 이틀 잘 지내다가도, 다시 불덩이가 되어 체온계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와중에 출산가방을 황급히 싸서 집을 오래 비워야 하는 마음이라니. 불편했다. 순둥이인 첫째가 저토록 힘들어 하는 걸 보면, 저도 얼마나 힘들어 저러는 걸까 마음이 쓰라렸다. 며칠 더 있다가 둘째를 낳아야 할까. 첫째의 몸이 힘든 걸까, 마음이 힘든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래저래 출산 스케줄을 변경하려 애써보았지만, 언제가 되었든 예상치 못한 일은 생기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니, 정해진 스케줄대로 하는 게 모두에게 덜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 수술로 낳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보통의 산모들은 진통이 오면 그 시간에 순응해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니, ‘지금부터가 둘아이 육아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운명에 몸을 맡기자.’ 그렇게 부부는 산부인과로 향했다.      

     

 을 기대하는 시간에는 이상하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자기야, 내가 혹시 둘째를 맞이하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해.” 라는 말을 하곤 했다. 가끔 끔찍한 사건들을 떠올리며, (지금 내 계획에는 맞지 않는 이 순간마저도) 얼마나 다행한 순간인가를 생각하며, 아이와 뒹굴었다. 아이 배에 입을 대고 푸-하고 불어주거나, 간질간질 해주면 깔깔깔 하는 딸을 보며,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일들에 아웅다웅 하기 보다, 이 뜨거운 생명체와 교감하는 시간은 내게 한없이 소중했다. 그런 의미에서 첫째가 아파줘서 감사했다. 내 시간을 주장할 수 없는 시간을 줘서 거꾸로 감사했다. 딸과의 내밀한 시간에 대해 알게 해줘서 첫째에게 감사했다.      


 “엄마가 집에 없는 동안은 아프지 말아라 딸아.
너는 동생이 있으나 없으나 엄마에게는 똑같이 소중하단다.
너에게 곁을 내줄 수 있는 시간을 줘서 고맙다 첫째야.”



3. 둘째를 만나다     


 좁은 수술대 위에 발가벗고 누워 새우등 자세를 했다. 마취의가 들어왔다. 허리에 차가운 액체가 흐르고, 나는 척수마취에 몸을 맡겼다. 그러고 누워 있으니, 이것이 내가 선택한 인생이 맞나, 순간 나의 인생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둘째를 얼른 갖고 싶다고 재촉했던 사실이 모두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한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걸까. 무엇하러 이 (둘 육아의) 고생을 나는 굳이 사서 하는가. 등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하반신 마취는 간단했다. 이윽고,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둘째가 내 앞에 왔다. 열 달 동안 뱃속에 있었는데, 그 순간엔 둘째가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머리숱이 까맣게 많은 둘째. 나에게서 난, 하나의 생명이 생의 몸짓을 하는 것을 보자, 갑작스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둘째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데, 그 피부가 얼마나 보드라운지. 몇 분 전에 했던 망상들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둘째는 너무 예뻤다. 작디작은 몸에서 “엄마 나야 나”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인생이 내게로 왔다. “손발 열 개 다 있죠 선생님?” 나는 다급히 물었다. “네. 모두 정상입니다.” 2.76kg의 작은 몸체는 나를 향해 온몸으로 인사했다.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이리 귀한 한 생명을 나에게 거저 주시나, 황송한 순간이었다.       

  


4. 둘 육아를 시작하며     


 첫째는 다행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잘 지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전화기 저편에서 첫째가 우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안다. 아이가 핸드폰에 대한 집착으로 칭얼대는 것이지, 몸이 아파서 꼭 칭얼대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러나, 괜스레 내가 첫째와 함께 있지 않아 더 첫째가 아픈 것은 아닐까, 괴로웠다. 매일 밤 병원 침대에서 베갯잇을 적시며 잠들기 일쑤였다. 첫째가 말은 못 해도, 몸은 아프지,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졌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외로움, 서운함 같은 감정을 마주하고 부인하며 적응해 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첫째의 감기가 소강상태로 나아갈 무렵, 아이는 나를 보러 조리원으로 왔다. 나를 보자마자 두팔 벌려 “엄마” 하며 오긴 했지만, 지금 본인이 현실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외할머니와 아빠란 걸 아이도 아는 걸까. 아이는 (나랑 있어도) 외할머니와 아빠 껌딱지로 금세 돌아갔다. 그래도 엄마를 잠시나마 보고가서 인지, 아이의 마음속에 안정감이 가득해진 모양이다. 첫째는 보채지 않고, 집에 도착해 곧장 꿀잠을 잤단다. 나도 첫째를 보고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날은 나도 베갯잇을 적시지 않고 조리원에서 간만에 편히 잠자리에 들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첫째가 잘 지내고 있었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과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제부터는 감정의 사치일 수 있음을.    


 일주일쯤 지나자, 모든 것이 안정기로 들어갔다. 첫째도 많이 보채지 않게 되었고, 주 양육자로서 엄마를 대신해 육아의 많은 부분을 맡아오신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컨디션도 가까스로 나아지기 시작했다. 남편 역시 퇴근 후에 첫째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매워주려 애써왔다. 온갖 바쁜 일들 사이에서 남편은 아이를 소아과에 데려가고, 어린이집 알림장 쓰기에 투약의뢰서까지 챙겼다.


 본격 ‘네 식구 살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주장할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순간은 자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럴때마다 이때를 생각하며 즐거이 순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숨을 크게 고르며, ‘그럼에도 감사할 부분부터 찾기’를 계속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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