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비린 것들
나는 환경보전 시범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곳에서 우리는 플라스틱이 분해되는 데 500년이 걸린다는 것을 처음 배웠다.
500년. 그 숫자는 어린 나에게 너무 길고 막연했지만, 동시에 두렵게 느껴졌다.
학교 주변에는 화학 공장이 있었다.
어느 날 그 공장 아래로 흘러나오는 검고 냄새나는 물을 봤다.
그 속에서 물고기들이 죽어 떠있었다.
교과서 속 이야기가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본 현실이었다.
그때 나는 믿었다. 어른들이 언젠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어른들은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 어른이 되었을 때, 상황은 오히려 더 심각해져 있었다.
바다거북이 비닐봉지를 먹고 죽어가는 사진이 뉴스에 나오고, 새들의 뱃속에서 플라스틱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어린 시절의 또 다른 기억.
동해바다에서 백합조개를 주워 삶아 먹고 놀던 여름방학.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발밑에서 느껴지던 조개의 감촉. 햇볕에 반짝이던 조개껍데기를 주워 모으던 그 순수한 즐거움.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바다에서 무얼 줍고 있을까.
조개가 아니라 플라스틱 병을. 깨진 유리 조각을. 쓰레기를 줍는 것이 놀이가 되어버린 세상.
가슴이 먹먹해진다.
석유문명의 기가 막히는 걸작, 플라스틱.
한때 기적이라 불렸던 이것은 이제 지구와 사람 모두를 병들게 하는 필요악이 되었다.
사실 우리는 플라스틱이 채워주는 값싼 편리함에 열광했다.
클릭 한 번이면 원하는 물건이 집 앞까지 배달되는 세상. 쉽게 구한 것은 쉽게 버릴 수도 있었다.
나 역시 그 모순 속에 살았다. 환경을 걱정하면서도 택배를 주문했고,
플라스틱을 두려워하면서도 일회용 컵을 받았다.
어린 시절 화학 공장 아래 죽은 물고기들을 보며 느낀 공포를 간직한 채로도.
SNS에 올릴 사진 한 장을 위해 물건은 소비되고 버려진다.
우리는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소유했다는 증명을 위해 돈을 쓴다.
유행이 지나면 그 물건은 촌스럽고 불필요해진다.
기능과 상관없이 쉽게 버려진다.
어이없게도 쉽게 물건을 버릴 수 있는 것마저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물건 본연의 가치에는 의미가 없으니 아껴 쓰거나 고쳐 쓸 이유도 없다.
중고로 현금 거래가 가능한 명품이라면 물론 말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공포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기다렸던 '어른들’은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 어른이었으니까.
그래서 시작했다. 지구를 태초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리와인드라는 소셜벤처를.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생분해성 일회용품을 만드는 아이엠그리너를 만들었다.
하지만 생분해성 제품을 만들면서도 여전히 한계를 느꼈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너오브젝트라는 브랜드를 꾸려가고 있다. 커피박처럼 버려지는 것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오래 쓰이고 의미 있게 기억될 물건을 만든다.
완벽할 수는 없다. 여전히 나도 플라스틱을 쓰고, 택배를 받고, 때로는 불필요한 소비를 한다.
리와인드에서 아이엠그리너를 거쳐 그리너오브젝트까지.
이 여정은 완벽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덜 해로울까’에서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순환할까’로. 조금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었다.
소비가 문화인 시대에 소비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소비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덜 사고, 더 오래 쓰고, 의미 있게 간직하는 것.
버려지는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플라스틱의 역설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환경만이 아니다.
물건과의 관계, 소유의 의미, 소비의 가치. 그리고 바다에서 백합조개를 주워 먹던 그 순수한 즐거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는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고쳐 쓰고, 한 번 더 아껴주는 것.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내일을 만들어간다.
화학 공장 아래서 죽은 물고기들을 보며 눈물 흘리던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오늘도 작은 선택을 한다.
백합조개를 주워 먹던 바다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