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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레논 Sep 19. 2023

사랑의 사재기

사랑에 빠지자마자 이별을 걱정하는 병에 걸렸다

어쩌다 오랜만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덜컥 겁부터난다, 언젠간 헤어지게 될 거니까. 사랑에 빠지자마자 이별을 걱정하는 병이 처음부터 있는 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이별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이별에 서툰 사람이라는 걸 배웠다.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능력이 태생적으로 부족한 사람. 그러나 아무리 겁을 내고 걱정을 해도, 때가 되면 헤어짐은 찾아온다. 떠나간다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었고, 17년간 함께한 노견의 당연한 죽음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 어떤 종류의 이별만은 막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이건, 점점 낡아가는 물건과의 마음 아픈 이별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내가 취하게 된 특단의 조치다. 어떤 물건이 마음에 들면 두 개, 세 개씩 사두는 습관. 일명 사랑의 사재기라고 이름 붙이면 적당하려나.


그래서 우리집에는 똑같은 네이비색 아페쎄 스웨터가 3장, 오아시스 베스트 앨범 초판한정 포스터가 2장, 교토에서 사온 보라색 펄양말이 5켤레와 같은 식으로 물건들이 존재한다. 여러 개의 똑같은 물건들 중 오직 한 개만이, 버리기에 능하지 못한 주인과 함께 낡아간다. 아직 새 것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동일한 여분의 물건들은 모두 일종의 보호장치(투명 비닐, 포장박스, 액자 등) 안에 곱게 싸여있다. 그렇게 다양한 물건들은 저마다의 버려질 수 없는 이유들로 사재기의 희생양이 되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정판이기 때문에. 해체 직전 락밴드의 마지막 내한공연 굿즈이기 때문에. 촉감과 핏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드는 스웨터를 겨우 만났기 때문에. 왠지 그 교토 양말 가게에 다신 못 가게 될 거같아서. "다음에 또 사면 되지"라는 헐렁한 마음가짐으로 한 개만 사두었던 물건들은 나중에 낡아서 버려질 때가 되었을 때, 난 쉽게 놓아주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비합리적인 맥시멀리스트로 비웃음을 살만한,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 들어차 있는 나의 옷장은 그래서 헤어지지 못하는 마음의 집합소다.


언젠가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에서 아이팟(애플의 MP3 플레이어)에 '꺼짐(OFF)'버튼은 만들지 않고 '잠자기(HOLD)' 버튼만 만든 이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잡스는 암투병을 하던 당시, 어떤 것이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이 있어서 영원히 이어진다고 믿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팟이 완전히 꺼진 상태가 되면 마치 죽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잠시 잠들어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잠자기 버튼만을 남겨둔 것이라고 한다. 그 인터뷰를 읽고 난 후부터는 내 아이팟의 잠자기 버튼을 눌렀을 때, 바로 탁 꺼지지 않고 디졸브 되듯 서서히 어두워지는 화면을 보면서 전자기기임에도 일종의 숨이 붙어있다고 느껴졌었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겠지만, 잡스가 생전에 똑같은 검정색 터틀넥을 쟁여놓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착장은 아니었을 것이니까, 잡스는 살면서 어느 순간 평생 정착해도 될만큼 마음에 드는 터틀넥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터틀넥이 언젠가 낡고 헤지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에게 새 터틀넥 수백장을 주문 제작하는 그 마음을 나는 알 것 같다. 사랑의 사재기는 어쩌면 물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헤어짐에 서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나는 또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면 여러 개를 살 거다. 여전히 이별은 두려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나는 또 열렬히 사랑에 빠질 것이다, 언젠간 헤어질 걸 알면서도.

그리고 주어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 것이다, 언젠간 생이 다할 걸 알면서도.


옷장을 열어 사랑하는 스웨터를 조심스럽게 꺼내 입는다. 찬 공기가 느껴지는 아침 문 밖을 나서며 가수 잔나비의 노래 <처음 만날 때처럼>의 가사를 떠올린다. "안녕은 그리 쉬운 게 아냐. 우리가 처음 만날 때처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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