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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U Dec 13. 2017

D-1 : 시작이 심상치 않다.

어느 맹한 여행자가 파리에 도착하다.

비행시간은 12시간이다.


비행기 좌석 위치를 미리 예매할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자리는 창밖을 볼 수 없는 통로 쪽이며 그 와중에 사이에 낀 좌석이다.


※대한항공과 연결편인 에어프랑스 소속 비행기라 미리 좌석을 정할 수 없다고 한다.


막상 잠이 오질 않는다.

기내식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이면 귀신 같이 간식을 줄 때마다 눈이 떠진다.

맥주도 한 캔씩 꼬박꼬박 주문한다.

많이 먹어야 본전을 뽑는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영화 목록을 살핀다.

라라랜드가 있다.

많은 이들이 추천한 영화이자 사실 좀 보고 싶은 영화였으나

너무 많은 이가 추천해 안 본 영화다. (삐뚤어진 성격 탓에 너무 많이 추천하면 거부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재밌다.

기내식을 먹고 다시 잔다.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라라랜드 O.S.T는 순례길을 걷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되었다.>


얼마나 멍하게 있었을까?

잠시 후 파리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내리기 전 유럽에서 사용가능한 유심으로 교체하고자 한다.

크로스백에서 유심과 환전한 돈을 넣어둔 비닐백을 찾는데 보이질 않는다.

배낭에 넣었나 생각하고 수화물을 찾아 교체하기로 생각한다.


인천공항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파리 공항은 오히려 한가해 보인다.

12시간을 비행했지만 시차로 인해 파리는 대낮이다.

낯선 언어와 낯선 이들이 가득한 공항이 혼란스럽다.

안내표지판을 보며 수화물 찾는 곳으로 향한다.


공항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하다.

친구에게 도착했음을 알리고 짐을 찾아 나가겠다 문자를 보낸다.


20여분 정도 수화물을 기다리자 배낭이 나타난다.

무사히 파리까지 온 배낭과 나에게 감사하며 배낭 속 유심을 찾는다.


.......


????


.......


이상하다. 보이질 않는다.

분명 새벽에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심과 환전한 돈을 비닐팩에 넣어 챙겨놓았다.


얼굴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어느새 손에서도 땀방울이 맺힌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으니 어디선가 놓고 온 것이 분명하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당황한 채로 친구를 만난다.

식은땀을 흘리며 친구에게 이 황당한 상황을 전한다.

친구도 몹시 당황하기 시작한다.


유심이야 사면되는데 비닐팩 안에는 2,000유로가 들어있다.

돈으로 환전하면 270여만 원이다.


그저 멍할 뿐 황망하기 그지없다.

몇 번을 더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파리에는 나의 돈이 없음을 온전히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황망한 감정이 어느새 차분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나의 뇌는 너란 놈에게 이런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님을 상기시켜준다.


평소에도 자주 잃어버린다. 맹한 성격 덕분에 물건도 기억도 가끔은 정신도 자주 놓는다.

덕분에 돈을 잃어버리면 걱정하기보다 그 돈을 주운 누군가의 기쁨을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도 이건 꽤 큰 금액인데 분실에 익숙한 나의 뇌는 이 일이 특별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극단의 상황에 도달하면 그렇다는데, 꼭 그런 꼴이다.


당황한 친구와 달리 나는 다시 웃기 시작한다. 친구가 반갑다.


ATM기에 들려 돈을 찾고 우선 숙소를 향하기로 한다.

당황한 친구가 출구를 찾질 못한다.

친구의 안내에 따라 공항을 한 바퀴 반 돌고 나서야 출구를 발견한다.


어떻게 숙소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친구와 버스를 탔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버스에 내려 지하철을 갈아탔으며 평정심을 찾은 친구는 파리의 지하철 문이 버튼을 눌러야 열린다는 것과 표는 10장씩 구매해야 저렴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친구는 매우 유명한 건물이라고 하였으나 나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가 에어비엔비로 구해준 숙소 앞에 도착했으나 주인과의 연락이 두절이다.

30분 정도 기다린 후에 연락이 닿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친절한 주인아저씨께서는 방에 있는 음식들은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하신다.

나갈 때 키는 우편함에 넣어달라고 이야기한다.

친구가 그렇다고 한다.


숙소에 눌러 앉아 쉬고 싶다.

허나 유심이 없는 나의 아이폰은 생존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유심을 사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수다도 더 떨어야 한다.


상점 문이 닫기 전 유심을 사야 한다.

몇몇 가게를 살펴보지만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사용 가능한 유심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데이터 용량에 비해 가격도 비싸 맘에 들지 않는다.

친구가 파리에서 쓴다는 유심을 사기로 하고 오페라역에 있다는 가게로 향했다.


FREE라는 이름을 지닌 유심은 그 이름에 걸맞게 프리한 데이터 용량을 자랑한다.

프랑스 내에서 한 달간 50기가의 용량을 사용할 수 있었고 파리 외의 유럽 지역에서도

한 나라당 3기가의 용량을 사용할 수 있다.

가격도 유심 가격(10유로)을 포함해 29.9유로로 한국에서 구매한 유심보다도 훨씬 저렴하다.

물론 속도는 기대할 수 없다.


핸드폰에 유심을 끼우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70일을 생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심 쇼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무엇을 먹을 거냐는 친구의 질문에 맛있는 거라 답한다.

괜찮다는 음식점을 향해 걸어갔고 식사를 주문한다.


<파리에서의 첫끼는 훌륭했다. 가격은 모르겠으나 그 맛은 잊을 수 없다. 물론 콜라 맛도>


지금 이 기분을 해결할 음료로 콜라를 선택한다.


코카콜라 맛은 전 세계 어디나 동일하다. 한국에서 먹었던 콜라도

몽골에서 먹었던 콜라도 파리에서 먹었던 콜라도 같은 맛이다.

청량감이 나를 위로한다.


미학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는 꽤나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순간 하루 정도라도 친구에게 파리 안내를 부탁할 걸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친구가 바쁠 것이란 것은 생각도 안 한다.)



그렇지만 기차표가 예약되어있으니 내일 오전에는 파리를 떠나야 한다.

아침에 숙소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친구와 헤어졌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나니 잃어버린 돈이 생각난다.

황당하고 정신도 없고, 이 낯선 여행을 시작하기에 내가 너무 맹하구나 싶다.


한편으로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만큼 예측할 수 없는 여행이 기대가 된다.

변태임에 분명하다.



다음날 나의 돈은 인천공항에서 발견된다.

어느 맹청한 놈은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먹기 위해 가방에서 돈을 꺼냈고

고스란히 카페 앞에 더 큰돈을 흘리고 한국을 유유히 떠났다.

어느 한 성자께서는 그 돈을 분실물로 신고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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