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여행자는 도착까지도 범상치 않았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그러나 출발점은 다르다.
순례자들은 유럽의 다양한 순례길 코스를 따라 출발하는데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인 생장 피에 드 포르(Saint-Jean-Pied-de-Port)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순례길이 시작된다.
생장 피에 드 포르부터 약 800km,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 그 외에도 해안을 따라 걷는 북부길과 프랑스 지역에서 생장 디포르까지 이어지는 프랑스길,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포르투갈 길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순례자 증명서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100km 전인 사리아에서 출발하더라도 발급받을 수 있다.
나의 출발점도 생장 피에 드 포르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TGV 타고 바욘 역에서 한번 환승하여 갈 수 있다.
기차의 출발시간은 12시 30분, 기차역까지 친구가 따라와 준다.
조금 일찍 역에 도착했고 빵이랑 커피로 아침식사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이른 작별이 아쉬워 수다를 떨다 보니 출발시간이 다 되었다.
플랫폼에는 표를 가진 사람만 입장할 수 있다. 친구와 작별을 하고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출발 5분 전, 기차가 멈춰 서있다.
티켓과 출발시간과 플랫폼이 일치하다. 그런데 기차 번호가 다르다.
기차 두대가 같이 서 있다. 당황하기 시작한다.
티켓에 적힌 기차 번호를 찾아 맨 끝 칸까지 걸어가 보지만 티켓에 적혀있는 기차 번호가 보이질 않는다.
그 사이 기차가 출발한다고 한다. 우선 기차에 몸을 싣었다.
기차의 끝에서부터 앞을 향해 걸어간다. 탑승칸이 보이질 않는다.
<TGV 기차 티켓 : 문제의 기차 티켓, 사실문제가 있는 건 나였지만......>
기차 티켓의 좌석 보는 법은 당연히 알아둬야 했는데 참 한심하다.
당황은 했고 티켓까지 프랑스어로 되어 있으니 자리를 모르겠다.
TGV 기차는 일 등급 칸과 이 등급 칸으로 나눠져 있다. 우리나라의 특실과 일반실이라고 보면 된다.
다른 점은 등급별로 기차 칸의 번호를 매긴다. 일 등급 칸 1번 -3번 칸, 2 등급 칸 1번-10번 칸 식이다.
VOITURE 10은 기차 칸 번호인 것 같고 좌석이 076인 것 같다.
정작 좌석에는 '13/76'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작정 앞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가다 보니 더 이상 앞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아직 내 좌석을 찾지 못했는데 갈 수가 없다.
역무원에게 영어로 물어보기로 한다.
승무원께서는 영어를 못하신다. 손동작으로 뭐라고 하시는데 모르겠다.
다만 걱정스러운 표정 대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대로 타도 되는 듯하다.
종이에 두 개의 네모를 그려 넣고 뒤의 네모에서 앞의 네모로 화살표를 그리는 걸 보니 이동하라는 것 같다.
문뜩 KTX가 떠오른다. 용산에서 출발하는 KTX 중 두 개의 KTX를 이어 붙여서 출발하는 경우가 있다.
두 대의 KTX는 익산역에서 분리되는데 한쪽은 목포로 또 한쪽은 여수를 향한다.
아무래도 나의 기차는 중간 어딘가에서 분리되는 듯하다.
100% 확신은 없으나 승무원의 편안한 표정을 믿기로 한다.
다음 정차역에서 앞 기차로 옮기기로 했다.
잠깐 청하기로 한 잠은 포기하고 기차가 정차하길 기다리기로 한다.
다행히 프랑스어에 능통한 승무원께서는 나를 위한 빈 좌석을 제공해주었다.
<TGV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 : 이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나의 심장은 다른 이유로 쿵쾅되고 있었다.>
환승역인 바욘까지는 다섯 시간, 그 안에 기차를 옮겨타야한다.
작은 도시를 지날 때면 기차가 속도를 늦추는데 세 시간 넘게 정차하질 않는다.
언제 정차할지 몰라 배낭을 멘 채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
바욘까지 한 시간 정도 남고서야 드디어 기차가 정차했다.
등산가방을 들쳐 매고 앞 기차를 향해 내달렸다.
어디 이뿐이랴.
한국에서 여행하는 버릇은 해외에서도 똑같다.
이제야 오늘 묵을 숙소를 예약하기로 한다.
핸드폰으로 AIR B&B 어플을 실행하는데, 인터넷이 안된다.
그렇다. 빠르게 달리는 TGV 기차 안에서는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첫날부터 노숙을 해야 한단 말인가 걱정이 될 때쯤 갑자기 신호가 잡힌다.
작은 도시를 지날 때면 기차가 속도를 늦추는데 그때 조금씩 신호가 잡히는 것이다.
도시를 지나가는 3분 남짓한 시간들을 모아 예약을 하기로 한다.
회원가입절차가 복잡하다. 이메일 인증도 해야 하고, 카드도 등록해야 하고 이게 뭔가 싶다.
집주인과 바로 연락할 수도 없다. 상대방에게 쪽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려야 한다.
하여튼 뭐가 이리 복잡한지, 미리 예약하지 않은 내 잘못이 분명하건만 프랑스의 통신환경을 탓한다.
다행히 하늘은 나의 편이다. 도착이 코 앞에 왔을 때 집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인분께서는 픽업 서비스까지 제공해주신다고 한다.
환승역인 바욘에 도착해 생장 피에 드 포르로 향하는 기차로 갈아탄다.
이제야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산복과 등산가방을 멘 사람들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중간중간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들도 많다.(전부 한국인이었다.)
<생장 피에 드 포트 역 : 이 역에 도착한 순간은 환희였다.>
7시가 되고 나서야 생장에 도착했고, 주인분께선 내 이름을 크게 써넣은 팻말을 들고 계셨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순례자 여권을 사기 위해 도착한 안내소 문은 닫혀있었다.
안내소는 오전 9시에 문을 연다고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로 하고 밥을 먹기로 한다.
식당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순례길을 출발하려는 사람들, 혹은 다음을 기약하며 이제까지의 순례를 마치는 사람들이다.
가격은 비쌌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고기와 시원한 탄산이다.
맥주 한 잔에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든든하게 먹고 나니 힘이 난다.
<저녁식사로 주문한 스테이크 : 사진을 예쁘게 찍을 생각도 못하고 허겁지겁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집들의 모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길치인 나는 숙소의 위치가 기억나지 않았다. 일반 가정집이었기에 간판도 있을 리 없다.
식당에서 5분 거리인 집을 찾기 위해 30분을 헤매었고 숙소에 도착한 나는 쓰러졌다.
나 정말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