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어보니 16년쯤이나 지났다. 정이현 작가의 <삼풍백화점>이 수상한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은 수상작품집이다. '현대문학상'이 한자로 쓰여 있고, 분홍색과 짙은 회색으로 가득 채워진 표지가 기억난다. 그 책을 선물 받았던 대학교 후문의 한 골목길도 함께 떠오른다. 그 작품집으로 정이현 작가의 글을 처음 만났고, 그 이름을 꼭 기억하리라 다짐했었다.
이번에 내가 읽은 두 번째 수상작품집은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젊은작가상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2010년 제정한 문학상이라고 한다. 얼마 전, 이 책의 e북 이용권을 선물 받았는데 내가 쓰는 전자책 플랫폼이 아니어서 앱 설치를 며칠 망설였다. 메시지함에 남아 있는 이 선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16년 전 그 작품집이 떠올랐다. 나에게 정이현 작가를 소개해줬던 그 책처럼 이번에도 좋은 글과 작가를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새로 앱을 설치했다.
현실만큼 다양한 소설 속 세상
작가의 개성이 묻어나는 여러 편의 소설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로 새로운 세상과 경험을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데, 소설이 특히 그렇다. 소설을 읽으며 그 장면이나 인물들을 머릿속에서 그려내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치 영화의 프레임처럼 화면이 이어진다. 이 책으로 만난 소설 중에는 정말 사실 같아서 마치 내가 아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이어서 더 현실감이 컸을까. 마치 실존인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감 있는 묘사도 좋았다.
여성이나 장애인,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주제가 걸린 공모전이 아닌데도 여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는 건, 그 특징들이 오늘을 잘 설명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책 가장 뒤쪽의 평론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종종 언급됐다. 몇 년 전부터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신작들에서 그런 흐름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번 수상작품집에서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한 느낌이다. 세상의 다양성만큼이나 문학도 영화도 다양해져야 하니까,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반가운 일이다. 예로, 이 책에 수록된 작품 <나뭇잎이 마르고>에 나오는 밝고 매력적인 인물은 여성 퀴어 장애인이다. 내가 그녀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고 해도 그녀의 삶을 생각해본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함께 소설과 영화로 만난 <미 비포 유>를 통해 후천적으로 신체장애를 갖게 된 주인공의 감정을 생각해봤던 일도 떠올랐다.
평론의 재발견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일을 꿈꿔왔다. 숫자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고 있지만 글 쓰는 일을 꿈에서 덜어낸 적은 없다. 당연히 문학상이나 공모전에 늘 관심이 있었다. 소설이나 에세이, 시는 물론이고 준비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희곡까지도 생각하는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평론이다. 평론을 따로 주의 깊게 읽어본 적도 없었다. 때로 소설책 뒤에 짤막하게 붙어있는 정도가 내가 경험한 전부였다. 잘 모르니까, 다른 장르와 다르게 '창작'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관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글 속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인데, 평론은 그 기반이 다른 대상에 있다고 여겨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이 책에는 수상작 뒤에 바로 각 작품에 대한 평론이 뒤따른다. 나는 평론의 가치와 그게 하나의 장르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해했다.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면 극장을 가득 채운 어둠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든다. 이 책에서 평론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 손을 잡고 작품 속 세상으로 다시 한번 초대한다. 조금 전까지 마치 나의 삶처럼 진하게 공감하던 소설 속 세계를 함께 거닐면서, 각 장면들을 잠시 멈추고 그 의미를 여러 각도로 살펴본다. 해설자의 일방적인 설명 같지만 실제로는 나와 함께 대화하면서 완성된다. 내가 인상 깊었던 장면에서 더 오래 함께 머물고, 평론가가 발견한 내용을 들어본다. 가끔 나와 다른 시선에서 바라본 장면이나 인물의 의미를 통해 같은 소설을 새롭게 읽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메모를 기록하면서 두 번 이상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좋은 평론들과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평론을 통해 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여운이 길다. 보통 책 뒤에 붙은 해설이나 평론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이번 기회로 나의 책 세상이 더 넓어졌다. 영화든 문학작품이든 좋은 평론을 통해 작품을 소개받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여전히 나는 아직 평론에 도전하고 싶지 않다. 평론의 가치를 이해했고 이 또한 창작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작품 속의)도 잘 이해해야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 대해 좋은 통찰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허구의 세계와 사건들을 통해 지금 현실을 보게 되니까. 나의 본업인 데이터를 다루는 '일'에서는 객관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세상을 보고 이해할 때는 지극히 주관적인 나여서 평론에는 자신이 없다. 좋은 통역사가 되기 위해 양쪽의 언어와 문화를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평론을 시도하려면 나에게 한참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다만 언젠가 '아직'을 떼어내고 미숙하나마 평론을 시도해보고 싶다. 작품 속 세계를 분석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처럼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자신도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 새로움을 경험해보고 싶다. 이번 책은 평론에 대한 내 생각을 이렇게 바꿨다. 어쩌면 좋은 작품이나 작가를 소개하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다. 새롭고 의미 있는 '장르'를 나에게 소개한 셈이니까.
또, 다른 세계로
이 책을 읽기 위해 알라딘 ebook 앱을 설치했다. 최근에는 교보문고의 전자책 어플도 새로 이용해봤다. 온라인 교보문고에서 책을 주문했더니, 배송이 될 때까지의 며칠간 전자책 Sam 이용권을 제공해서다. 나는 리디북스 셀렉트를 꾸준히 구독하고 있고, 이북 리더기로 리디에서 판매한 페이퍼 프로를 쓰고 있어서 다른 전자책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리디 셀렉트로 볼 수 없었던 책을 편하게 (그리고 선물이나 혜택으로 생긴 기회니까) 읽어보려고 짧게나마 두 서비스를 접해본 셈이다. 알라딘 ebook 앱에서 오늘 소개한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교보문고에서는 다른 두 권의 책을 읽었다. 낯선 화면 구성이나 익숙하지 않은 기능은 짧은 사용기간 동안 내게 불편함으로 남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앱을 삭제하려다 문득 여러 전자책 플랫폼의 장단점을 알고 싶어졌다. 분명 리디북스를 처음 사용할 때도 화면 구성이나 기능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리더기의 물리적 버튼이나 스와이프 등의 동작을 익히는 동안 실수가 몇 차례 반복되었던 것 같다. 내 경우 e북 리더기를 먼저 고르고 거기 맞춰 리디북스에 정착한 것이어서 사실 제대로 각 서비스를 비교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각 서비스의 장단점을 분석해두었겠지만, 유저 입장을 떠나서 제품 관점에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전자책 서비스의 주요 사용자들 중에는 여러 플랫폼을 함께 이용하는 유저가 많을까, 중복 이용률이 얼마나 될까.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좁은 내 주위 지인들을 떠올려보면 한 플랫폼을 주로 이용하는 유저가 많을 것 같은데 실제로도 그럴까. 이 비즈니스에서는 사용자를 Lock-in 시킬 수 있는 기능이나 콘텐츠가 가장 중요할까. 제품 관점에서, 사용자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 이 회사들은 어떤 데이터를 보고 개선하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이 회사들의 최우선 지표는 무엇이 되는 것이 좋을까.
젊은 작가들이 보여준 새로운 세상과 인물들이 나를 리프레시한 덕분일까. Reader 중 한 명으로만 바라보던 전자책 서비스를 데이터로 세상을 읽는 분석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직접 그 업계의 데이터를 살펴보지 않고 내 의문을 풀어보려면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경험에서 나온 인사이트를 기꺼이 말해줄 동료들이 있다는 점이 떠올라서 즐거워졌다. 이 책을 펼치며 기대했던 새로운 시각과는 전혀 다른 길이지만, 어쨌든 사고의 영역을 더 넓혀준 셈이다. 책의 매력이 이런 게 아닐까. 책 속의 세계를 한참 즐기고 나오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나 풍경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소개된 작가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다시 새로운 책에서 만나고 싶은 기대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