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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이즈 백>이 묻는 '당신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

믿음이란 의심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안은 채로 함께 가는 용기다

by 느리게걷는여자

1. 통제 뒤에 숨겨진 믿음의 역설: ‘판단을 잠시 미루는 용기’


중학생 아들을 키우다 보면, 아이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더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괜히 한 번 더 살피게 된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걱정돼서 그래”라고 말하지만, 그 말 뒤엔 늘 사랑과 불안의 줄다리기가 존재한다.


영화 <벤 이즈 백 BEN IS BACK>의 엄마 홀리(줄리아 로버츠) 역시 그 줄다리기의 한가운데 서 있다. 약물중독에서 회복 중인 아들 벤이 연휴 동안 집에 돌아오자, 홀리는 그의 방을 뒤지고, 소변 검사를 요구하며, 외출까지 통제한다.겉으로 보면 믿음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통제의 밑바닥에는 벤이 다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럼에도 그가 다시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향한 끈질긴 희망이 동시에 자리한다.


결국 부모가 자녀를 믿는다는 것은 확신을 가지는 일이 아니다.
믿음은 판단을 유예하는 인내이며, 아이의 가능성을 끝까지 지켜보려는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2. 완벽한 믿음은 신화다: 불완전함과 함께 가는 관계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믿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실망의 가능성도 알고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홀리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과거의 상처가 깊어 벤이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불안해한다. 이 흔들림은 그녀가 불완전한 인간임을 보여주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진짜 믿음의 구조를 드러낸다.


완전히 믿을 수 없기에 더 노력하고, 확신할 수 없기에 더 다가가며, 의심이 있어도 손을 놓지 않는 것.
홀리의 행동은 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너는 다시 넘어질 수 있어. 그래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믿음이란 의심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안은 채로 함께 가는 용기다.


3. 엄마가 손을 놓지 않은 이유: ‘두 번째 아이’를 보는 시선

홀리가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벤 안의 두 사람을 모두 보기 때문이다.

과거의 벤 — 가족을 무너뜨렸던 아이

가능성의 벤 — 다시 살아보려고 애쓰는 아이

부모의 시선이란 결국 이 두 존재 중 ‘두 번째 아이’를 선택해 바라보는 일이다. 홀리는 벤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가 다시 일어설 가능성만큼은 놓지 않는다. 그 선택이 바로 그녀가 아들이 손을 끝내 놓지 않는 이유다.


4. ‘충분히 좋은 엄마’의 심리학: 완벽 대신 관계를 선택하는 태도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Donald W. Winnicott)의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는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위험을 대신 막아주려 하지 않고

아이가 실수할 여지를 인정하며

실망스러운 순간에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홀리는 바로 그런 엄마다. 세상의 위험을 모두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 태도. 그리고 필요할 땐 단호하게, 때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약함으로, 아들과 함께 흔들린다.


중학생 아들을 키우는 나에게도 이 개념은 현실적인 위로가 된다. 부모에게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는 꾸준함, 아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마음일 뿐이다.


5. 결론: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

<벤 이즈 백>은 부모의 믿음이 얼마나 무겁고 때로는 무모해 보일 만큼 절실한지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난 뒤, 나는 내게 되물었다.
“아이를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에게 답한다. 믿음이란 아이가 다시 실수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아이가 다시 일어설 가능성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선언이라고.

부모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아서 더 따뜻하고, 흔들림 속에서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기에 가장 깊은 형태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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