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일, 관계, 나 자신에 대한 회고
세밑 사흘을 숫자 속에 푹 파묻혀 지냈다.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와 현금흐름표의 숫자를 더존과 홈택스와 통장과 카드 내역과 맞춰보는 작업은 생산성이 높지 않은 일인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거의 6~7년 동안 위임했다. 하지만 사소한 하나의 이슈로 인해, 1년 치의 방대한 자료를 펼치게 되었고, 20시간이 넘는 시간을 쓴 후에 깨달았다. 역시 이 작업은 시간의 블랙홀이면서 생산성은 높지 않구나.
새해를 앞두고 숫자의 숲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2023년 한 해 평가를 슬쩍 지나칠 뻔했다. 그런데 피터 드러커의 '인간을 성장시키는 거의 유일한 도구가 피드백'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 1년간 다이어리와 일기장 기록을 다시 펼쳐보며 회고의 글을 쓴다.
한 해를 되돌아 보니 일, 제품, 통장 잔고가 나의 1년 성적표라는 생각이 든다. 12월 31일자에 우리 팀에 속한 인재가 얼마나 증감했는지, 우리 제품의 경쟁력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우리 회사의 톰장 잔고가 얼마나 늘거나 줄었는지가 바로 나의 성적표다. 조직문화, 시스템, 브랜딩, 마케팅 등의 활동은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에 반해 인재, 제품, 통장 잔고는 사실적이다. 재무상태표로 말하자면 무형 자산보다 유형 자산이 더 명확하다. 이는 일 뿐만 아니라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전제 조건 하에 1년을 쭉 훑어 보았다.
회고 순서는 일, 관계, 개인(나) 순서다.
1년 내내 이력서 검토와 면접이 이어졌다. 뛰어난 이력서를 발견해 반가울 때도 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인터뷰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23년 퇴사자 중 2명은 특히 아쉽다. 잠재력이 컸던 디자이너와 감각 좋은 포토그래퍼를 떠나보냈다. 3년 이내 상장을 목표로 CFO를 3달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채용했으나 3달 만에 차이를 확인하고 떠난 점도 아쉽다. 남양주에 있는 물류센터 리더가 합류해서 그곳이 안정되고 대규모 물량도 순조롭게 출고 가능해진 건 성과다.
1년을 되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떤 인재가 우리 팀에 새롭게 합류했으며, 어떤 인재가 우리를 떠났으냐는 점이다. 뛰어난 핵심 팀원 2명이 이탈했고, 유능한 리더가 1명 합류했으니 재무상태표 상으로 0원이다. 23년도에 가장 아쉬운 점이다.
연초에 경쟁력 있는 제조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박람회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생산 거래처를 계속 확보해 가격과 품질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재고 원단을 소진하려고 만들었던 제품이 의외로 큰 성과를 거두어 여름 매출을 리딩했다. 기획한 이도, 디자인한 이도, 마케팅한 이도,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이었다. 매해 가을 시즌 매출을 리딩했던 핼러윈 아이템들이 사회적 이슈로 매출 볼륨이 많이 축소되었다. 우리 브랜드가 확고하게 리딩하고 있는 복종에서는 지속 성장했으나, 새롭게 도전한 복종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24년도 과제로 넘겼다.
역삼동에 사옥 부지를 계약했다. 고지대의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우리 멤버들이 들어가서 일하기에 이상적인 곳으로 판단했다. 중도금과 잔금 지급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해결했다. 하우빌드의 도움으로 핏이 맞는 설계사를 만나 설계를 마쳤다. 철거를 했고, 현재 시공사 입찰 준행 중. 가을 입주가 목표다.
중국법인을 보다 체계화시켰다. 중국지사 회계 담당자를 채용했고 법인통장 세무기장을 내부기장으로 바꾸었다. 한국과 다른 세법과 운영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법인 운영 경험이 많은 분을 소개 받아 조언을 들었다. 중국 수출을 위해 CBME 박람회에 참가했고, 중국 거래처 확보를 위해 카툰페어에 참관했다. 중국지사장 역할을 하던 리더가 멘탈 관리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1달 휴가 제공을 통해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패션 외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첫 시작은 뷰티. 동백오일이 들어간 고보습 유아로션을 기획해서 여름에 런칭했다. 뷰티 시장을 배우며 경험을 쌓고 있다. 가을에 여행·레저 카테고리 상품을 선보였다. 2가지 디자인이 인기를 끌면서 패션 외 카테고리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했다.
4년 동안 운영했던 여성복 브랜드와 2년째를 맞는 주니어 브랜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나의 역량 부족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남성복 브랜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담당팀 멤버들의 맨파워가 뛰어나 내년 실적이 더욱 기대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 매장을 늘렸다. 19년도 16개였던 오프라인 매장은 22년도 4개까지 줄였었다. 올해 다시 8개점으로 늘렸으며, 24년도에도 매장을 계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네이버쇼핑의 SEO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했다. 주변의 권유로 네이버쇼핑 로직에 대해 두 차례 공개 강의를 진행했다. 알고리즘 연구와 툴 사용으로 확실하게 매출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이것이 착각인 걸 깨달았다. 상위노출 로직은 배워두면 도움 되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진짜 중요한 건 제품력과 브랜드, 고객서비스라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대시보드 자동화를 위해 씨그로라는 툴을 도입해 커스터마이징 중이다. 1년 반 전에 구글의 클라우드 데이터 웨어하우스인 빅쿼리와 시각화툴인 루커 스튜디오를 결합해 대시보드를 만들려고 시도했었다. 프리랜서 개발자와 함께 한 이 프로젝트는 이지어드민 API와 빅쿼리 연동 과정에서 일부 데이터가 누락되는 에러를 해결하지 못해 중단되었다. 23년 가을에 씨그로팀을 만나 대시보드 자동화 프로젝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재개되었다. 출근시 각 팀 담당자들이 수작업으로 구글 스프레드 시트에 입력하고 있는 수많은 지표들이 자동으로 시각화되어 우리에게 보다 나은 인사이트를 제공해 줄 걸로 기대하고 있다.
실무에 AI를 도입했고 확대시키고 있다. Chat-GPT는 사용 빈도가 크지 않으며 멤버들이 산발적으로 활용했다. 이에 비해 그래픽 관련 AI는 사내에서 전사적으로 도입했다. 대표적인 3가지 AI 이미지 생성툴인 달리3, 미드저니, 스테이블디퓨전을 모두 테스트한 후 우리에게 잘 맞는 툴을 선택해 실무에 활용하고 있다. 우리 회사에 필요한 프롬프트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커뮤니티가 축소되었다.
배움이 크거나 친구처럼 편한 자리가 아닌 곳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걸 그만두었다. 한 비즈니스 모임에는 정중하게 양해 인사를 드리고 탈퇴했다. 간헐적으로 갖는 모임에는 앞으로 참석이 힘들 거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소모임 자리에도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인지 아닌지 한번 더 따져보고 신중하게 참석 여부를 결정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모임에서 대화를 통해 배우는 게 크다는 맹신 하에 웬만하면 모임에 참석했다. 이는 유효하다. 하지만 그 배움의 가치가 내 시간의 가치보다 적다는 걸 깨달았다. 내 나이 때문일 수도 있다.
온라인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의미를 주지 않는 카톡단톡방은 아쉬움이 남더라도 과감하게 모두 나왔다. 카톡에서 나누는 형식적인 인사말도 줄였다. 세상에 별다른 가치 창출을 하지 못하면서 의례적으로 하는 행동을 안하다보니, 본질적인 관계만 남고 커뮤니티가 축소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모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하려고 설명회까지 참석했으나 이 역시 내가 쓰는 시간보다 가치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 신청하지 않았다.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상 관계는 넓어졌다. 페이스북에 쓴 글 중 몇 편이 공유가 꽤 되었다. 이 덕분에 나와 닮은 생각을 가진 페이스북 친구를 여러 명 알게 되었다. 얕은 관계이긴 하지만 그들의 글에서 때론 인사이트를, 때론 위로를 얻었다.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의 값은 더 비싸진다. 다 사용하고 난 뒤에 내 시간을 잘 썼다는 기분이 드는 곳에 시간을 아껴서 쓰는 건 24년도에도 계속할 생각이다. 안 쓴 시간은 돈과 달리 보관이 안 되고 소멸해 버리는 만큼 달리 쓸 곳이 없을 때는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라는 걸 좀 더 할 '생각'이다.
대체로 평온했다. 집주인이 실거주할 사람에게 아파트를 파는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새로운 터전은 '건강'한 삶을 첫 번째 조건으로 골랐는데,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좋은 이웃사촌을 만나 주말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큰아들이 쓴 책이 일본어판으로 일본에 출간되었고 작은아들은 군 휴학을 한 후 두어 달 전에 유튜버를 시작했는데 구독자가 15만 명을 넘겼다. 아내와는 자주 산책했고, 주말엔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에 맥주를 마셨다. 간혹 재래시장에 어묵을 먹으러 다니면서 일상을 즐겼다. 12살이 되는 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매일 산책을 즐겼고, 간식을 자주 먹었으며 명절 때는 백숙을 양껏 먹었다.
글을 썼다. 대학 졸업 후 업무상 글을 쓴 적은 있었지만, 업무와 무관하게 꾸준하게 글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족과 지인들의 격려 덕분이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의외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좋아요와 댓글이 확실히 글 쓰는 재미를 배가시켰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아직 책으로 엮진 못했지만, 24년도에 잘 마무리해서 그동안 쓴 글들을 책으로 내 볼 계획이다.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 이사할 곳을 알아본 때 아파트 내 수영장이 있느냐를 첫번째 조건으로 삼았다. 7월에 아파트 수영장이 개장한 후 주 3회에서 5회 꾸준하게 수영을 했다. 독감에 걸린 2주와 연말 2주를 제외하고는 이를 잘 지켰다.
수영을 하고 가장 크게 바뀐 건 나의 정체성. 수영을 하기 전 나는 나 스스로를 '허약하고 배 나오고 운동 못하는 중년의 사무직 노동자'라는 자의식이 있었는데 수영을 한 후 '건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리더'로 자의식이 바뀌었다. 삶에 활력이 생겼다. 실제 52주 중 독감에 걸린 2주 빼고는 건강한 신체를 잘 유지했다.
책을 37권 읽었다. 한 달에 3권꼴이다. 사내 북클럽과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비즈니스 북클럽 책을 빠짐없이 모두 읽었다. 이 책들이 총 24권. 하반기에 트레바리 리더십 관련 북클럽 한군데에 조인하면서 읽은 책이 2권. 11권은 개인적으로 읽은 책들이다. 북클럽에서 주로 읽는 책들이 비즈니스와 경제 경영 서적이 주인만큼 개인적으로는 문학, 과학, 에세이 그리고 분야와 무관한 베스트셀러를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지인들에게 선물한 책은 아래와 같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 자녀가 축구 선수 활동을 하는 아빠 2명에게 선물.
대화의 밀도 : 아내에게 선물
어린이라는 세계 :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는 지인에게 선물.
역행자 : 스몰 비즈니스를 하는 지인 2명에게 선물.
만화로 보는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 이웃에 사는 초등학생에게 선물.
아버지의 해방일지 : 아내에게 선물
올해 읽은 책 (읽은 순)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 두려움이 없는 조직
- 책 잘 읽는 방법
- 유난한 도전
- 대화의 밀도
- 숫자로 일하는 법
- 더기버
- 승진의 정석
- 최고속 성장의 조건 PDCA
- 인스파이어드
- 미치게 만드는 브랜드
- 회복탄력성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 신제품 마케팅을 위한 스몰데이터
- 어린이라는 세계
- 역행자
- 거인의 리더십
- 어제를 버려라
- 나를 믿고 일한다는 것
- 만화로 보는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 무인양품 보이지 않는 마케팅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어느 날 400억 원의 빚을 진 남자
- 여행의 이유
- 믹스
- 그림자를 판 사나이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리더를 위한 멘탈수업
- 아버지의 해방일지
- 비폭력 대화
- 지구를 살리는 옷장
- 죽음의 수용소에서 (삼독)
- 디즈니 시스템&매뉴얼
-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비즈니스의 미래
- 부의 차월차선
새해를 울릉도와 포함에서 가족들과 보냈다. 여름엔 가족들과 코나키나발루를 다녀왔고 가을엔 고등학교 친구들과 나고야 여행을 다녀왔다. 가벼운 나들이로는 한국에서는 회사 직원들과 불암산 등반을, 지인과는 아차산 야간 등반을 했다. 중국에서는 중국지사 직원들과 선리사 계곡을 다녀왔다.
여행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의 여유다. 사옥 부지 매입이라는 빅이벤트가 생기면서 심리적 여유가 부족했던 한 해였다. 물리적 여유가 아니라 심리적 여유가 중요한 만큼 24년도에는 멘탈 관리를 잘해서 심리적 여유를 되찾고 더 넓은 세상을 보러 다닐 계획이다.
내가 유지하고 있는 몇 가지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을 올해도 잘 유지했다.
2012년 Dayone이라는 앱을 통해 일기를 쓴 후 빠짐없이 꾸준하게 일기를 잘 쓰고 있다. 듀오링고라는 5분짜리 영어앱을 966일째 게임처럼 하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단어 맞추기 게임인 워들(Wordle)을 470일째 하고 있다. (이 게임은 아내와도 같이 하고 있는데, 정답이 같은 만큼 지인과 함께 하면 재미가 배가된다.)
아침 출근 전에 5분 정도 책을 읽는 습관도 잘 유지하고 있다.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출근 전 활자를 통해 한 문장이라도 읽고 나면 하루를 살아갈 양식을 먹은 기분이 든다.
사업을 하다 보면 리듬이 깨질만한 사건 사고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아주 작고 사소한 습관이더라도 매일 의례적으로 하는 행동이 멘탈 관리에 꽤 도움이 된다는 걸 느낀다. 하루 안 하면 빠뜨린 거지만, 이틀 안 하면 새로운 습관이 시작된다는 말을 경전 삼아 꾸준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 외에 23년도에 사소한 이벤트로 사진작가님을 초청해서 아내와 스냅 촬영을 찍었고, 물류센터 뒤 야산에 텃밭을 가꿔 오이와 참외를 키웠다.
얼마 전에 읽은 김혜남 작가님 책에 인생을 다시 살면 '더 많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은 떠오른다. 23년도 내가 잘 못 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실행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24년도에는 더 많이 도전하고 더 많이 실패해서 364일 후 다시 이러한 글을 쓸 때, 더 다양한 주제에 대해 회고해 볼 수 있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