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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Feb 04. 2024

호주에서 당한 열기구 사기 사건의 전말

살다 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힘든 순간들을 종종 만난다. 아니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사실관계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며 산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확증편향에 빠지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한다.  


이번 열기구 사기 사건 역시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교훈을 얻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나와 아내, 대학생 3학년과 4학년 연년생 아들로 구성된 우리 4인가족은 호주 동부 캠핑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로드트립 중 들렀던 지역마다 한두 개의 액티비티를 했는데, 골드코스트에서는 열기구와 서핑 배우기를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나와 아내는 영어를 하지 못해 두 아들이 각종 예약과 통역을 맡았다. 큰 아들은 열기구를, 둘째 아들은 서핑 레슨 예약을 맡았다. 


열기구를 타려면 새벽 3시경까지 집결지에 모여야 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대부분의 열기구는 동틀 무렵에 뜬다. 어릴 적 배웠듯이 열기구는 대기 기온보다 열기구 풍선 속 온도를 더 뜨겁게 해서 뜨는 원리이다. 그러다 보니 대기가 가장 차가운 5시에서 6시 사이가 가장 효율적인 시간대다. 여기에 덧붙여 열기구가 뜨려면 광활한 평야가 필요했는데, 그곳까지 이동하는데도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 걸리다 보니, 새벽 3시에는 집결해야 열기구 체험이 가능하다.


우리 캠핑카가 머물고 있던 홀리데이 파크(캠핑카 주차장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 줄여서 '홀팍')에서 집결지인 더스타골드코스트 호텔까지 우버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새벽 2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 열기구 체험은 달콤한 잠을 포기할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의견일치를 봤고 마침내 큰아들이 구글링을 한 후 한 열기구 회사에 예약을 했다.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비몽사몽 상태에서 양치질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전날 예약해 둔 우버를 타고 집결지인 더스타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로비에는 동양인 3~4명과 서양인 5~6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고 나이가 70은 다 되어 가는 백인 할아버지가 운전석에 내려서 우리 이름을 불렀다. 로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다른 회사 열기구를 신청했는지 그 버스에는 우리만 탔다. 버스에 올라가 보니 예닐곱명쯤 되는 동양인이 이미 탑승해 있었다. 말투와 행색으로 보니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버스는 낡았고 좌석은 불편했다. 


나이 많은 기사님은 아이패드를 넘겨주며 우리에게 개인정보 및 동의서를 작성해 달라고 그랬다. 쉬운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이름과 국가, 연락처와 이메일, 어떻게 자기 회사를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호주 체류 기간과 체중 입력란이 있었다. 체중은 열기구 탑승 시 총중량을 파악하려고 입력하나 보다 여겼는데, 호주 체류 기간은 왜 알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1~3일, 4일~1주일, 1주일 이상, 현지거주 등의 보기가 있었다. 여행 막바지로 3일 후 귀국이라서 첫 번째 보기를 선택했다. 


버스 출발 전에 열기구 탑승에 관해 설명하는 거 같은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중요한 얘기는 아닌 거 같아서 자리에 앉아 졸고 있는 애들한테 통역을 요청하지 않았다. 곧 버스가 출발했고 30분 정도 시내 도로를, 30분 정도 산길을 달려서 한 휴게소에 들렀다.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그래서 맑은 공기를 쐬고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애플 워치가 4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드문드문 구름이 보였다.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다시 버스에 탔는데 버스가 출발하지 않았다. 기사분이 어딘가 전화 통화를 한참 동안 하더니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문제가 좀 생겼다고 안내를 했다. 버스에 타고 있는 동양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영어로 설명했으나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들한테 물어보니 오늘은 열기구가 뜨지 않는다는 거였다. 세상에. 이 새벽에 일어나서 1시간 동안 달려왔는데,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열기구를 탈 수 없다니.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더니 아들의 통역은 다음과 같았다. 


어젯밤에 비가 내렸지만 열기구를 띄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열기구 운항팀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바닥에 물이 많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출발지를 다른 장소로 옮겼는데 그곳 역시 바닥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열기구를 실은 차량이 이동할 수가 없었다. 열기구를 띄워야 회사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오늘은 물리적으로 운항이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되돌아가야만 한다. 


아들의 통역을 듣는 동안 중국인 중 영어를 잘하는 한 명이 몇 가지를 질문했고 나이 든 기사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답변을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잠시 후 차가 후진을 해서 우리가 올라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잠이 다 깬 나는 2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로 든 의문은 하늘에 구름이 좀 끼여 있긴 했지만 정말 열기구를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을까? 우리가 묵은 홀리데이 파크에는 비가 내린 흔적이 없었다. 불과 2시간 거리인데 열기구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고?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두 번째, 만약 국지적 폭우가 있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 사실을 1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파악할 수 있었을까? 1시간 전 호텔에서 만났을 때 오늘 열기구 탑승은 캔슬된 걸 알려주는 게 상식적이지 않나? 이 역시 일반적이지 않았다. 


둘 다 확률은 낮지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인 건 맞다. 하지만 낮은 확률이 연달아서 일어날 확률은 극도로 낮다. 첫 번째 확률이 10%, 두 번째 확률이 10%라고 가정할 경우 이 2개가 동시에 일어날 확률은 1%다.( 10% x 10% = 1%) 10%의 확률은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지만 1%의 확률은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으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의심이 싹트자 어제 아들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1인당 20불에 환불 보험 옵션이 있는데 가입할까요?' 


환불 보험을 가입하면 우리가 임의로 캔슬해도 환불을 해 준다고 그랬다. 나는 일정 변경은 없다고 확신하면서 굳이 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고 그랬다. 그리고는 열기구를 준비했는데 캔슬이 되면 피해가 크니까 저런 식으로 보험 상품을 판다면서 호주는 역시 합리적이라며 아내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들한테 어제 환불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서 환불 못 받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는데, 그 사이 아들도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더 상품을 확인해 봤는데 그 보험은 우리 쪽 사정으로 취소할 때 환불을 받을 수 있는 경우라며, 이렇게 날씨로 취소된 경우엔 당연히 환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랬다.  


사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나는 별의별 사기를 다 당해봤기 때문에 아들의 확신에 찬 답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약관 어딘가에 천재지변으로 인한 운행 취소 시에는 환불을 해 줄 수 없다는 문구를 넣어두고 폭우 역시 천재지변으로 치부하면 얼마든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사기를 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들한테 우리가 예약한 회사의 이름을 물어봐서 구글맵에 접속해 리뷰를 살펴봤다. 추천순에는 좋은 리뷰가 많았는데 리뷰 남긴 아이디를 클릭해 보니 리뷰 기록이 이 회사 한 번뿐인 아이디가 많았다. 리뷰 조작의 냄새가 났다. 구글 리뷰는 아이디를 클릭하면 그 아이디의 리뷰 기록이 나온다. 평소에 리뷰를 남기지 않는 사람들은 불쾌한 경험을 했을 경우 악플을 남기는 경우가 있긴 하나, 좋은 평점을 남기는 이들은 대체로 여러 개의 리뷰 기록이 있는 게 일반적이다. 


최신순으로 다시 정렬을 변경해서 살펴보니 리뷰가 더욱 이상했다. 1주일과 2주 전에 좋은 리뷰가 일괄적으로 달렸고 그 아래로 1점짜리 리뷰가 연달아서 5개가 있었다. 1점짜리 리뷰는 1달 전에 주로 달렸다. 1점을 남긴 이유는 크게 2가지였는데, 하나는 날씨로 인해 취소가 되었는데, 환불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고, 또 다른 종류는 열기구 이동 버스가 낡았거나, 열기구를 탄 후에 열기구 정리하는 걸 시켰거나, 친절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서비스 관련 것들이었다. 두 번째 종류의 1점 리뷰는 반가웠다. 어쨌든 열기구가 떴다는 거 아닌가. 그런데 첫 번째 종류의 1점짜리 리뷰는 심각했다. 그중에는 한번 취소가 되어서 다른 날에 변경해서 갔는데 또 취소가 되었다면서 이 회사의 열기구는 영원히 뜨지 않을 것이고 날짜 변경도 의미 없고 환불도 못 받을 거라는 리뷰도 있었다. 


느낌이 싸했다. 모든 열기구 회사가 다 이럴까? 다른 회사들은 환불을 어떻게 해주는지 궁금해서 직접 번역을 해 가면서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구글맵에서 압도적 1위를 하고 있는 열기구 회사의 리뷰에는 거의 5점 만점에 가까운 리뷰가 달려 있고 취소나 환불에 대한 리뷰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다음으로 리뷰가 많은 2위 사이트도 비슷했다. 사진과 함께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다른 열기구 회사에는 취소, 환불에 관한 리뷰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가 이용한 회사에만 댓글이 이렇게 안 좋고 환불 관련 리뷰가 많은 것일까? 아까 버스를 탔던 호텔에 다시 내려 우버를 불러서 캠핑카에 도착하니 6시가 다 되었다. 다들 수면 부족과 허탈감에 녹초가 되어 각자 1층과 2층 침대에 올라가서 그대로 뻗어 잤다. 


한숨 자고 나니 생각이 맑아졌다. 인근에 한국식당이 있어서 모처럼 한국음식을 먹기로 하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식당 영업시간까지 3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해서 애들은 캠핑카에서 쉬고 아내와 나는 바닷가를 구경하며 열기구 건에 대해 상의했다. 옵션은 3가지였다. 


1. 그냥 환불을 받고 열기구 체험은 포기한다.

2. 환불을 받지 않고 내일 이 회사의 열기구를 타러 또 간다. 

3. 리뷰가 안 좋은 걸 알게 된 만큼 환불을 받고 다른 열기구 회사에 재등록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식당문을 열고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시키고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데 큰 애가 폰을 확인하더니 안 좋은 소식이 있다고 그랬다. 환불 관련해서 문의 메일을 보냈는데 ‘환불 불가’라고 답변이 왔다는 거였다. 재문의를 해도 약관에 의해 환불은 절대 불가능하고, 우리는 환불 가능한 보험 상품을 추가로 구매하지 않았다는 점만 반복해서 얘기했다.  불길한 예감은 잘 틀리지 않는다더니. 


이제 상황은 심플해졌다. 이 회사가 사기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했다. 그걸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다른 회사에 열기구가 떴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다른 회사에는 열기구를 띄웠는데 이 회사만 안 띄웠으면 이 회사는 사기를 치고 있는 게 확실하다. 내 가설을 아들에게 설명하고 1위 회사 홈페이지 전화번호를 보여주고 상담을 해 보라고 그랬다. 우리가 겪은 일도 솔직하게 알려주면서. 


그 사에 밥이 나왔는데, 전화 통화를 하던 아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우리가 이용했던 그 회사에서 오늘 열기구를 2개가 띄웠다. 이곳에는 열기구 회사가 몇 개 안 되고 파일럿도 몇 명 안 되기 때문에 하루에 어떤 회사에서 몇 개의 열기구를 띄웠는지는 모두 안다. 그 회사는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사기에 가까운 영업을 해서 이 지역 열기구 평판 자체가 나빠지고 있어 우리(1위 열기구 회사 상담 직원)도 아주 싫어하는 회사다. 열기구가 안 뜨면 당연히 환불을 해줘야 하는데, 그 회사는 이런저런 보험을 언급하며 환불을 안 해준다. 이런 경우 아주 강력하게 대응을 해야 환불을 받을 수 있다. 우선, 오스트레일리아 관광청에 이 사건을 접수하겠다고 그러고, 둘째, 구글에 별점 테러를 하겠다고 그래라.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모든 노력을 강구할 것이라고 강하게 컴플레인을 걸어라.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으면 다시 우리에게 연락을 해라. 위챗으로 연락하면 상담하기 더 좋으니 위챗 연락처를 주겠다. 


사기 회사인지 아닌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상황은 좀 더 구체화되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오늘 이 회사의 일부 손님은 정상적으로 열기구를 탔고 우리는 타지 못했다. 아주 강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환불받기가 쉽지 않다. 즉 진상을 떨어야만 환불을 받을 수 있다는 것까지 확인이 되었다. 우리는 왜 이 회사가 오늘 2개의 열기구는 띄웠는데 하필 우리가 탈 열기구는 띄우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다소 허무맹랑한 가설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집단지성의 힘으로 나중에 괘 설득력 있는 추론이 나왔다. 우리가 내린 최종 가설은 다음과 같다. 


아이패드로 개인정보 동의서를 작성할 때 체류기간 정보를 얻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 이는 의도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즉, 단기 체류자들이 많을 때만 날씨 핑계로 열기구 운항을 취소한다. 특히 중국인은 구글맵 접속이 불가능해 리뷰도 못 다니까 사기 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다. 아시아인들은 영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고 단기 체류자들의 경우 항의를 지속적으로 못할 테니까 아시아인 중 단기 체류자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른다. 현지인과 장기체류자, 영어능숙자들에게는 정상적으로 서비스를 해서 구글 리뷰를 관리한다. 열기구 한대 띄우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만큼 한대를 안 띄울 경우 그 모든 원가가 이익이 되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가설 하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응방안을 세워 보았다. 크게 3가지 대응이 가능했다.  


1. 강하게 항의해서 환불을 받게 되면 우리에게 도움 준 1위 회사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으면서 열기구를 탄다

2. 강하게 항의해도 환불을 안 해 줄 경우 계속 컴플레인을 제기하고 내일 1위 회사에서 열기구를 탄다. 이 경우 끝낸 환불을 못 받을 경우 열기구 체험에 2배의 돈을 지불하게 될 소지가 있다.  

3. 지금이라도 인당 2만 원짜리 환불 보험에 가입해 달라고 요청하고 내일도 열기구가 뜨지 않을 경우 환불을 받고 열기구 체험은 포기한다. 


밥을 다 먹고 서핑 레슨장으로 이동하면서 최근 구독자가 22만 명을 넘긴 둘째 아들은 이 사건을 콘텐츠로 만들어보겠다고 그랬다. 그러면 구독자 중 최소 100명 정도는 이 회사 구글맵 평가에 별점 테러를 하지 않겠냐며 우리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와 아내는 서핑 레슨 회사에서 오늘은 바람 때문에 서핑 레슨이 취소되었으나 환불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그러는 사이 큰아들은 결심을 한 듯 그 회사에 전화를 해서 크게 화를 내면서 강하게 항의를 했다. 상담원이 전화를 끊어버렸고, 다시 전화를 해서 엄포를 놓았다. 이 과정을 몇 번 거친 후에 그 회사의 입장을 전해주었다. 


1. 원래는 환불 옵션은 사후 가입이 되지 않으나, 우리가 화가 난 것 같으니까 특별히 가입시켜 주겠다. 내일도 만약 열기구가 뜨지 않는다면 보험료를 제외한 금액을 환불해 주겠다. 총 80불을 추가로 결제해 달라.

2.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우리에게만 특별히 열기구 탑승 이후에 삼페인 포함 아침식사를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 

3.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1시간 이내에 회신을 달라. 회신이 늦거나 내일 열기구를 타러 오지 않을 경우 환불은 원칙대로 불가능하다.


그 사이 서핑 레슨이 시작되어 우리 4명은 2시간에 걸쳐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서퍼스 파라다이스에서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서핑을 배웠다. 몇 번 일어서서 타는 데 성공해 성취감도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핑 레슨이 끝난 후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추가로 돈을 입금하는 건 절대 반대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손실이 더 커질 수 있었다. 환불을 받고 1위 업체에 재등록하는 게 최선인데 이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1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그냥 날릴 수도 없었다. 결국 아침 식사 옵션은 필요 없으니까, 그 비용을 환불 비용으로 대납처리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내일 속는 셈 치고 다시 한번 더 새벽에 열기구를 타러 가기로 했다. 아들은 우리가 그쪽 업무 시간이 지난 후에 답변을 해서 우리 요청이 접수되었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고 그랬다.  


다들 내일 열기구 뜰지 말지 반신반의하면서 새벽 기상에 재도전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남반구에서 보는 겨울 별자리는 특별해서 밤늦게까지 별도 보고 별자리 얘기도 나누고 싶었으나 열기구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이는 포기했다. 새벽 2시 10분에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빗소리였다. 이런. 잠시 후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아내가 ‘아, 비가 내리네’라고 한탄했다. 혹시나 싶어서 아이폰으로 이 지역 시간대별 날씨를 확인해 보니 계속 구름이었고 비모양 아이콘은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비이기를 바라며, 애들을 깨워 후 우버를 타고 다시 집결지인 호텔로 이동했다. 


집결지에는 어제 보다 더 많은 백인들이 로비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안도했다. 어제 우리가 세운 가설에 따르면 일행 중 중국인이 많으면 열기구는 취소될 확률이 높고, 백인이 많으면 탑승할 확률이 높았다. 어제 보다 더 많은 백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와 같은 열기구 회사의 대기자들이기를 염원했다. 


곧이어 버스가 도착했고 어제와 다른 젊은 운전기사가 내렸다. 어제의 그 할아버지 운전기사가 아니라서 우리는 또다시 안도했다. 사기를 칠 때 항의를 줄이기 위해서 불쌍한 할아버지 기사를 쓴 게 아닐까라는 의심도 했기 때문이다. 젊고 건장한 기사가 로비에 들어와 이름을 호명하자 대기하던 백인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본인 이름들을 확인한 후 버스에 차례차례 탔다. 우리도 마지막에 따라 타려고 했는데, 기사가 우리를 보더니 이쪽 버스가 아니라고 그랬다. 딱 그 타이밍에 뒤에 버스가 한대 더 도착했고 그곳에서 어제의 할아버지 기사가 내렸다. 오 마이갓. 아내는 애들에게 ‘우리도 이 버스에 타고 싶다’고 통역해 달라고 그랬고 아들이 얘기했으나 젊은 기사는 ‘저 버스가 당신들이 탈 버스’라고 얘기하고는 버스에 올라타 먼저 출발했다. 


호텔 로비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 중에 우리만 2번째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버스에 오르자, 그 안에는 모두 중국인만 가득히 앉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아내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저 버스를 타야 하는데’라며 탄식의 소리를 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예전에 읽었던 빅토르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한 장면이 떠 올랐다. 어떤 버스에 타느냐에 따라 일반 감옥과 죽음의 가스실로 나뉘던 장면. 한 사람의 생사가 어떤 버스에 타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던 그 장면 같았다. 


어제 보다 중국인이 훨씬 많아서 빈 의자가 3개에 젤 끝에 목받이가 없는 조그마한 보조석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내는 보조석 앞자리에 앉았고 나는 보조석에 앉았다. 아들들도 뿔뿔이 흩어져 앉아 있어서 통역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아내는 이 버스를 탄 순간 우리가 열기구를 탈 확률은 30% 이하로 떨어졌다며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나는 오늘은 열기구가 뜰 거 같다고 답변했다. 내가 당시에 열기구가 뜰 거 같다고 말한 근거는 2가지였다. 


첫째,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황인 만큼 아내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오늘 새벽에 우버를 타고 오면서 우버 기사한테 들은 정보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우버 기사에게 이 시간 때에 열기구 손님을 자주 태우는지 물어봤다. 기사님은 열기구 회사 직원들을 간혹 태우는데, 여기 날씨는 1~2시간 사이에도 급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직원들이 다시 자기를 불러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그랬다. 그 얘기를 듣자 내가 처음 이 회사를 사기 회사로 의심하게 된 2가지 원인 중 하나가 제거되었다. '급변하는 날씨'가 실제 팩트였다. 그렇다면 오늘 열기구가 뜰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지게 된 셈이다. 


차는 1시간 넘게 계속 달렸고 어제 그 문제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나는 어제와 달리 긴장감을 풀 수 없어서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내내 정면을 주시했다. 한 10분 쯤 지났을까, 버스 기사는 다들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물어보고는 다시 차를 운전했다. 어디 다른 곳에 차를 세워서 열기구가 취소되었다고 얘기할 하려나? 긴장을 완전히 풀지 않은 상태에서 창밖을 보는데 저 멀리 집채보다 더 큰 노란색 열기구가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닥터 프랑클이 연합군의 군대 깃발을 보았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버스에서 내리자 아까 봤던 백인들이 탄 버스가 앞에 서 있었다. 그 버스에서 내린 손님들은 노란색 열기구에, 중국인과 우리(나중에 보니 일본인도 2명 있었다)는 빨간색 열기구에 탔다. 생애 처음 타보는 열기구에서 우리는 소떼들이 거니는 평화로운 목장과 들판을 뛰노는 캥거루 가족들, 그리고 구름 속 일출을 보며 감탄했다. 1시간 동안 잊지 못한 하늘 여행을 한 후에 열기구는 안전하게 착륙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집결지였던 호텔 로비로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기사님이 와인과 아침식사 옵션을 구입한 분들은 이곳에서 호텔 뷔페를 즐기면 된다고 그랬다. 우리는 원래 이곳이 집결지여서 일단 내렸다. 다른 손님들이 모두 호텔 뷔페에 입장한 후 기사님한테 우리 사정을 알려줬다. 기사님은 우리는 조식 옵션이 등록이 안 되어 있다고 안 된다고 그랬다. 아들은 어제 상담사와 나눈 채팅 내용을 기사님께 보여줬고 기사님은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내용이 확인이 되었다며 조식 티켓을 4장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맛있게 공짜 식사를 먹었다. 


무료 호텔 조식을 즐기면서 아내는 어제의 모든 일은 용서가 되었다고 그랬다. 둘째 아들은 이 사건을 유튜브 콘텐츠로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고 그랬다. 큰 아들은 부실 예약으로 인한 마음의 부담감이 드디어 사라졌다며 안도했다. 나는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했기에 어제 일이 왜 일어났는지 좀 더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뭐가 있을지 되짚어 보았다.


확실하게 확인된 건 열기구를 한번 띄우는데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직접 봤다. 전문 파일럿에, 열기구 운반 특수 차량에, 상하차 요원 2명, 손님 운반 차량과 운전기사,  최고 화력의 가스통 5개 등 인적 물적으로 예상보다 더 많은 리소스가 투입되는 걸 확인했다. 어림잡아도 열기구 한대 운항에 대략 2백만 원 이상은 들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손님이 최소 13~14명은 넘겨야 손익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다. 열기구가 20인승~25인승까지 가능한 만큼 회사 입장에서는 이 인원을 모두 채우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만약 당일 신청자가 27명 정도라면 어떻게 할까?  20명은 태우고 남은 7명은 운행 취소를 한 후 그다음 날 열기구에 태우는 게 업체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다. 열기구는 인원과 무관하게 원가가 비슷하니까. 혹시 그 과정에서 누가 취소를 해도 상관없다. 대부분 환불 보험을 사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환불을 안 해줘도 되니까.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이 회사는 인원이 맞지 않을 때 환불을 해서 다음날 인원과 맞추는 편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제의 경우 총신청자가 50명 정도라고 할 경우 20명씩 2개의 열기구는 정상적으로 띄우고 우리가 탄 나머지 한 개는 오늘로 미뤘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아니면 보유하고 있는 열기구가 2개밖에 없어서 탑승자 초과로 인해 익일로 미루려고 거짓 핑계를 댔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실제로 이 회사에서 주장한 모든 내용이 사실일 수도 있다. 1위 회사는 경쟁사를 죽이려고 음해를 했고, 우리는 거기에 속아 공짜 조식까지 얻어낸 '진상가족'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글을 귀국행 기내 안에서 적고 있는 만큼 이 사건의 진실은 더 이상 파헤치기 힘들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2번에 걸쳐 새벽잠을 포기하긴 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 가족은 열기구를 탔고 하늘 위에서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진실과 무관하게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내가 어릴 적 세상은 공급자 중심이었다. 물건이 귀했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었다. 적당한 품질에 적당한 서비스에 수요자는 만족했다. 세월이 좀 더 흘러 내가 청년일 때 공급과 수요가 대체로 일치했다. 공급자와 수요자의 힘이 균형을 이뤘다. 다만 정보가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공급자 우위가 많았다. 정보 불균형은 공급자에게 더 유리했다. 


하지만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를 거치면서 이제는 확실하게 수요자 우위의 시대다. 정보 불균형도 많이 사라졌다. 스타트업은 이 정보 불균형의 틈새를 파고 들어서 의료, 금융, 법률, 부동산 등 전문 분야의 영역에도 리뷰를 활용해서 수요자에게 양질의 정보를 공개해 공급자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는지는 이번 열기구 환불 사건을 통해 판단할 있다. 그 회사의 모든 주장이 팩트라고 할 경우 이는 천재지변에 의한 취소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통제 불가능한 요소로 인해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피해가 생겼을 경우 누가 보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부분에서 공급자와 수요자의 힘싸움이 벌어진다. 


올해로 34년째 열기구 운행을 하고 있다는 이 회사는 여전히 공급자 위주의 정책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버스 운행과 열기구 준비 등 많은 비용을 들였음에도 날씨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 피해는 당연히 수요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객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를 유료 보험으로 헷지 할 수 있는 방안까지 친절하게 제공해주지 않았는가라며 항변한다. 


만약 공급자와 수요자가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이는 단순 환불로 종료될 일이다. 수요자는 꿀잠을 포기하고 할증료를 물어가며 집결지까지 이동했고, 공급자는 앞서 말한 비용을 들였다. 서로 손실을 쌤쌤이하기로 하고 사건을 종료시킨다면 이는 힘의 균형이 잘 이뤄져 있는 상태다.


모두가 잘 알듯이 이제는 수요보다 공급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이다. 한 명의 고객을 두고 다수의 공급자가 피 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 고객이 황제인 시대다. 수요자가 절대왕권에 가까운 권한을 갖고 있다. '너네 회사 사정은 너네 사정이고, 어쨌든 나의 수면시간과 우버 할증료는 어떻게 보상해 줄 건데?' 따지는 게 상식인 시대다. 천재지변에 의한 피해가 생겼을 때 손실은 전적으로 공급자가 지며, 수요자에게는 직접적인 피해 보상과 더불어 정신적, 감정적, 감성적 피해 보상까지 잘해줘야 경쟁력이 생기는 시대다. 


이 회사는 악성 리뷰에 자기들은 34년이 된 레거시가 있는 회사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 회사가 골드코스트에 첫 열기구를 띄운 34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면,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세상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프랑스혁명처럼 공급자는 왕좌에서 끌어내려져 단두대에 처해졌으며, 수요자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이 회사는 아직 세상의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게 이번 사건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땅바닥에 납짝 기대어서 고객을 왕처럼 모셔야 할까? 


나는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고객을 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고객은 내 곁에 있는 친구 같은 존재다. 나는 죽마고우를 늘 배려하고 잘해주려고 하지만 무례한 행동을 할 경우에는 단호하게 대응한다. 이는 내 친구가 나에게 대할 때도 동등하다. 신뢰와 배려를 기본으로 서로 돕는 관계이지 주종의 관계가 아니다. 


지금 시대에도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이러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다. 우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매력적이려면 아래 3가지 중 하나에 부합해야 한다.


1. 다른 회사에는 없는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여야 한다.

2. 다른 회사에 존재할 경우 이 보다 품질이 월등히 나아야 한다.

3. 다른 회사에 존재할 경우 이 보다 가격이 확실히 싸야 한다.  


3번째 경쟁력을 갖출 경우 수요자는 앞에서는 배려를 해 주겠지만 뒤에서는 욕을 할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이미 세상에 있는 제품과 서비스라면 월등히 나은 품질을 추구해야 하며, 아니면 세상에 없는 제품과 서비스를 창조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고객과 늘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다. 


만약 그 열기구 회사 역시 평범한 열기구 서비스가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서 뜬다거나, 열기구에서 개인 낙하산을 타고 낙하한다거나, 열기구 가스불에 삼겹살을 구워준다거나, 어쨌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서비스이더라도 차별화를 추구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약관을 악용해 동종업계와 고객에게 욕을 먹는 지금의 처지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야 선량하지만 한국식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 가족이 ‘세상에 이게 말이 되냐’며 진상을 뜨는 사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내에서 2시간 동안 이 글을 적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차별화와 품질 개선은 비즈니스맨의 숙명이라는 걸 이번 열기구 사건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더 크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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