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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유 Sep 24. 2023

밀키트는 집어치우고 진짜 요리를 해주세요

남편들의 ‘유쾌한 반란’

“독신이라도 잘 살아보세.”라고 천명한 것이 무색하게 올여름은 유난히 배고픈 나날이었다. 쌀을 씻기 싫어서 외식을 나갔고, 그조차 귀찮을 땐 누룽지나 과자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건강이 나빠지는 게 느껴졌다. 정상적인 식사가 고팠다. 그러나 나는 혼자였기에, 내가 나서지 않으면 식사도 없었다. 독신으로 산다면 앞으로도 이처럼 스스로의 식사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젊어서도 이렇게 빌빌거리면 나중에는 얼마나 더 대충 먹게 될까? 염려가 되었다.


이것저것 할 일이 태산이라 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을 위해 현대사회는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 교통, 의료, 쇼핑 등 모든 면에서 초연결적으로 빠름이 지향되고 있다. 식사도 예외가 아니다. 간편하게 조리하면 되는 밀키트, 대열 맞춰 대기 중인 반찬 팩들, 터치 몇 번이면 달려오는 배달 음식. 이러한 음식들이 만연한 환경은 1인 가구, 즉 독신이 ‘혼자 살아도 나쁠 것 없다.’라고 여기는 데 힘을 더한다.


1인 가구의 증가와 어머니 세대로부터의 요리법 단절로 요리를 할 줄 아는 것이 더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풍요의 시대, 음식은 넘쳐나 버려지기 일쑤고 음식이 경시되니 요리 능력도 경시되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쉽게 사 먹을 수 있으니 계란 프라이밖에 못하는 남성들도 어깨를 펴고 살아간다. 이에 따라, 주방의 주인으로 식사 전반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던 고유한 권위가 부정되었다. 어떻게든 배는 채울 수 있으니까, 여성 즉 아내라는 존재가 과거에 비해 덜 필요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여성을 대체하여 요리 않는 편리주의적인 방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때우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종의 연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젊어서는 활달한 기운으로 웬만한 식사 환경이든 다 소화해낸다. 혼밥하며 자신의 자유로움을 즐기고, 직장의 구내식당에서 공유식(共有食)을 먹고, 가끔은 튀긴 닭 다리를 뜯고 만족해한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한때가 아니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자식들이 없는 식탁은 쓸쓸하게 느껴질 것이고, 직장도 퇴직해야 할 테고, 치킨 같은 통속적인 음식도 점점 물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로는 식사를 때운다는 개념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전에도 언급한 바 있는데, 독신의 삶을 관통하는 연속성이란 개념은 매 끼니를 해결하는 일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인터넷에서 콩으로 하트를 그린 앙증맞은 도시락 사진을 보면서 그리해줄 수 있는 신부를 꿈꿔왔다. 이른바 여자력이라고 하는 여성성을 함양한 일본인 아내를 동경한 것이다. 스스로가 요리를 잘하지 못하기에, ‘나를 위해’ 정갈한 요리를 선물할 만한 여성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요리 불능을 가능자에게 일임하면서 동시에 요리를 못하는 여성을 낮게 평했다. 나는 요리하는 행위를 피하면서,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하는 기본적인 행위로부터 완전한 면책, 즉 해방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얻게 된 해방에는 의존성이라는 문제가 뒤따른다. 식모 같은 아내가 있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 반독립적이므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아닌 것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일정 에너지원을 섭취하는 일을 단순화하려는 고민에서, 아내를 식모라고 여기는 의존적 발상이 나타났다고 치자. 그런데, 그 ‘무급’의 식모가 언제까지 식모 노릇을 자처하겠는가? 가사노동비니 뭐니 헛바람이 들어 “주방 일을 안 하겠다.”라며 ‘기싸움’을 벌인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여성이 자신과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남성적인 남편을 원한 것처럼, 남성도 일에 집중할 때 식사를 독담해 줄 수 있는 여성적인 아내를 원했던 것인데, ‘요즘 시대에…’라고 운을 떼며 설거지를 하라고 핀잔주고 혼전과 다른 태도를 보이면서, 남성도 만들 수 있는 라면을 끓여주거나, 반찬가게의 반찬들을 늘여놓고 밥만 안치고 “주는 대로 먹어.”라고 한다면, 심지어는 제가 낮에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을 ‘재탕’해서 저녁 밥상에 올린다면, 그래도 감지덕지하며, 대를 잇게 해준 점을 참작하여, 독신에서 구제해 주었으니까, 무던하게 식사를 받아들이는가?


요리를 할 줄 아는 젊은 여성이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내 아내는 ―일반 여성들과 다르니까― 나를 위해 아침저녁으로 요리를 만들어(요새는 일어나는 걸로도 싸운다지만)줄 거라는 무조건적인 믿음은 위태로워 보인다. 침상에선 등짝과 대화하는 수모를 당하고, 밥상에선 편리주의적인 사랑 빠진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좀체 요리를 못하니까 아내의 권위는 부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유부남이든 독신남이든 요리할 줄 아는 능력을 갖기를, 요컨대 조리 도구를 적절히 활용하고, 식자재의 기본적인 종류를 알고, 제철 식재료를 이해하여 자신만을 위한 식탁을 차릴 수 있는 남자가 되기를 강하게 제언하는 바이다. 독신은 스스로의 배우자가 되어, 지아비의 수저를 놓는 아내의 성심과 같은 어떤 헌신을 자신에게 씌울 수 있어야 한다. 유부남도 마찬가지다. 기러기 아빠라고 아내와 떨어지면서, 인스턴트식품을 먹으며 건강을 해친 사례가 많지 않은가. 스스로를 돌보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여유도 없이, 가학을 부성애라 자위하면서 요리할 그 잠깐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못하는 생활이 어찌 정상이겠는가.


남성이라는 성은 요리에서 젬병이긴 하다. 식재료를 구매해도 알뜰하게 운용하여 살뜰하게 먹어야 하는데, 그러한 메커니즘을 고려치 않고 생각하는 것조차 여성적이라고 터부시한다. 어쩌면 고대부터 남성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들고 여성은 먹이기 위해 주걱을 들어왔기에, 그러한 분업을 수행한 가정들만이 대를 이어 왔기에 주걱을 드는 일에 자연스레 반감을 갖는지도 모른다. 


남성은 요리의 영역에서 전승된 성적 한계를 반드시 초월할 필요가 있다. 호시절은 갔다. 더는 여성들이 당연스럽게 주걱을 들지 않는다. 아내에게 반찬 투정 한 번 해보라. 주걱으로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나는 처연한 비관으로 나의 미래를 독신으로 점쳤다. 그러면서도 못내 내 요리를 전담할 여성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평생에 걸쳐 밥해줄 수 있는 여성은 세상에 단 한 명, 어머니라는 희생적인 존재뿐이다. 요리 실력을 구비한다면 훗날 어머니를 위해 식사를 대접할 수 있으니 공연한 헛일만은 아니리라. 현재는 도회에서 적당히 끼니를 때우며 요리할 줄 모르는 채로 ‘뻗대고’ 있지만, 언제고 이 의존을 깨서 요리법을 아는 여성들처럼 요리하지 못한다면 쪽방에서 아사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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