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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cht Sep 19. 2022

[철학] 테세우스의 배 - 동일성 문제

'박을수'와 '김갑수'는 동일인일까?


* 아래 링크에서 더 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licht_98/222877067411


검찰은 10년 전 발생한 A 씨의 살인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던 중 범인이 박을수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박을수는 7년 전 김갑수로 개명 신청하였다. 또한 5년 전에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잃었고, 주민등록까지 말소되었다. 하지만 검찰은 김갑수를 10년 전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기소했다. 김갑수는 성형수술로 얼굴과 신체의 모습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지문이나 홍채 등 개인 신체 정보로 활용되는 생체 조직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었다.           


김갑수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비록 10년 전 박을수가 그 사건의 살인범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피고인은 몸뿐만 아니라 성격도 박을수와 완전히 딴판입니다. 심지어 피고인의 가족도 그를 박을수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검사 측에서는 김갑수와 박을수가 동일 인물이라면서 다음 사례를 들었다. "불국사의 다보탑은 천오백 년의 시간 동안 낡고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몇 차례의 보수 작업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물리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다보탑입니다. 이에 변호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어 반박했다. "한 화가가 유화 작품 한 점을 제작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일단 작품을 완성했지만, 그림의 색조에 변경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화폭 전반에 걸쳐 새로운 색을 덧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 과정에서 화면의 새로운 색조와 어울리지 않는 모티프를 제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작품은 과연 원래 작품과 동일한 작품일까요? 경우에 따라서 화가가 그림에 새로 찍은 점 몇 개가 그림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판사는 이들의 전제들로부터 현재의 피고인이 10년 전의 범인과 동일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고심했다. 김갑수를 박을수로 볼 수 있을까?   [출처: 2014년 5급공채 언어논리 PSAT]           


 흥미로운 글이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동일성 문제라 부른다. 원본은 '테세우스의 배'로, 조선소에서 배를 고치는 이야기로 전래되어 온다. 간략히 소개를 하자면,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의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고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실을 입구에 매달고 미궁을 주파한 영특한 영웅이다. 그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괴물을 퇴치하자,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탔던 배를 '테세우스의 배'로 칭했다. 하지만 배의 원재료가 나무인지라 자주 수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마다 배의 널빤지를 하나둘씩 빼내어 새 널빤지로 고쳤다. 그러기를 몇 달, 몇 년을 반복하자 모든 널빤지가 새 걸로 바뀌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를 너무나 존경했던 조선공은 배의 원래 널빤지를 빠짐없이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 널빤지들을 조립해 테세우스의 배와 똑같은 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테세우스의 배가 어느 때처럼 수리를 받으러 왔는데, 그 옆에는 조선공이 만든 배가 있었다. 똑같은 형태의 두 척의 배가 나란히 정박하게 된 것이다. 이때, 어느 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봐야 할까?

출처: https://mappingignorance.org/2021/09/13/the-ship-of-theseus/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고 나니, 위의 문제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박을수와 김갑수는 테세우스의 배를 단순히 사람으로 치환한 것이다. 과연 두 척의 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같은 사람을 같게 볼 것인지, 다르게 볼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배가 사람으로 둔갑하게 되니 동일성 문제는 책임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분명 우리는 상식적인 선에서 '죄를 저지른 사람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에 기인하면 박을수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로서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상식, '죄 없는 사람을 벌 주어서는 안된다.'도 지켜야만 한다. 그렇다면 김갑수는 박을수와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만약 김갑수와 박을수가 같은 사람이면 이름을 바꿨든, 가족이 못 알아볼 정도로 생김새를 다 바꿨든, 심지어 성별을 바꿨든 간에 살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김갑수와 박을수가 다른 사람이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때 김갑수에게 박을수의 죄를 묻는 것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직 '박을수' = '김갑수'여야만 살인 사건을 종결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딜레마에 빠진다. 당신이 이 사건의 판사라고 해보자. 생김새와 성격, 행동, 생체조직이 전혀 다른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검사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길거리에 지나가는 철수와 영희를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긴다. 변호사는 검사와 피고인이 마찬가지 논리로 같은 사람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곤란하다. 그렇다면 변호사의 말처럼 이 둘은 다른 사람인가?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시점부터 다른 사람이 된 것인가? 생김새를 바꿨을 때부터? 성격을 바꿨을 때부터? 그 시점을 정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판결에서 시점을 정해버린다면, 다른 범죄자들이 이를 참고하여 사회적 문제가 커질 우려가 있다. 당장 내 앞에 있는 피해자 유족들의 원망하는 시선도 피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철학자들이 고안해 낸 정답은 동일성을 더욱 세부적인 개념으로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면 본 사안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다'의 개념을 엄밀하게 따져보자. '저 사람이 쓰는 노트북은 내 것과 같다.'와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와 같다.'라고 할 때의 '같다'는 동일한 뜻일 수도 있지만, 서로 다른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즉, 뜻을 다르게 본다면 전자의 동일성은 '같은 종류라거나 특징이 비슷한'(≒)을 의미하고, 후자의 동일성은 '완전히 똑같은 개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쓰는 노트북이 내 것과 완전히 똑같은 개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내 노트북을 훔쳐간 도둑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문맥을 고려하여 더 적합한 뜻으로 해석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앞의 동일성을 '질적 동일성'이라 정의하고 뒤의 동일성을 '수적 동일성'이라 정의했다. 개인 동일성 문제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수적 동일성'이다. 질적으로 어떤 차이를 갖든 간에 수적 동일성이 인정된다면, 같은 개체로 보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복장을 안 입고 있다고 해서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를 참고해 판결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김갑수는 박을수와 질적 동일성이 어느 정도 다르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정도가 수적 동일성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적 동일성의 판단 기준인 DNA가 일치한다는 중요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김갑수를 박을수와 동일인으로 판단하여 살인의 죄를 묻는다.'    


 이렇듯 철학은 난관에 봉착한 문제를 해결해준다. 개념의 구체화 방식을 통해서 예전서부터 이어져 온 동일성의 문제를 혁파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남아있다. 만약 DNA까지 박을수가 바꿨다면 어떻게 됐을까? DNA가 전혀 다른 사람을 수적 동일성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과학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이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문제는 다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또한, 철학자들이 고안한 수적 동일성의 개념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과연 동일인일까? 밤 사이 잠을 청한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나는 기억과 감각을 물려받았을 뿐, 순전 새로이 탄생한 존재는 아닐까? 전지전능한 악마가 매일 나를 새로 태어나게 만들고 있다면,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과거의 나와 동일한 인간인가? 동일성 문제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테세우스의 배'는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지만, 드넓은 사고(思考)의 바다 속에서 창의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를 지속하게 해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엔진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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