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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계 Apr 23. 2022

너를 사랑해줘, 마츠코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영화 후기


이 영화는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익히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안 보고 싶었다.

스무살 초반에 친구들이 인스타 스토리에 '이게 뭐람??'이라는 스토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정신이 혼란스럽다고 하고 어떤 이는 코미디라고 하는 이 영화를 나는 지금 봤다.

그리고 나의 인생 영화가 되었다. 나는 지금 본 것을 후회 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어릴 적 봤다간 싫어하는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영화가 되었고 여전히 울게 되는 영화가 되었다.

아마, 나이가 먹어서도 이 영화는 나에게 먹먹함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나에게 주겠지.

여튼, 내가 감동 받은 부분을 몇가지 짚어본다.



그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츠코는 계속 인생이 끝났다고 말한다. 중학교 교사 재직시절 도난 사건을 무마시키려다가 잘릴 때, 폭력을 행사하는 작가지망생 동거남이 자살할 때, 마츠코가 기둥서방을 죽일 때 등등 마츠코의 인생은 끝날 것 같지만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된다. 마츠코는 매 순간 타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했으며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었다. 그런 마츠코에게 돌아온 것은 사랑이 아닌 폭력과 외로움, 살인, 성매매녀가 된다. 결국 혼자서 인생을 포기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이렇게만 보면 마츠코는 정말 인생을 개막장으로 산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누구도 마츠코에게 욕을 할 수 없다.

마츠코는 최선을 다했다. 끝날 것 같은 인생도 끝까지 살아갔다.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죽기전까지도 말이다.

나는 마츠코의 일생이 혐오스럽지 않았다. 나는 마츠코가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랑이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향해 많은 일들을 겪고 자신을 결국 혐오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말이다. 마츠코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모두를




왜?


마츠코는 자신의 사랑이 실패할 때마다 말한다. '왜?' 나는 이 대사가 너무 슬펐다. 그러게 왜일까. 왜 사람들은 받는 사랑을 베풀지 않는 것일까.

마츠코에게 누구도 진심이었던 남자들이 있었을까?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마츠코는 어렸을 적 아픈 여동생때문에 소홀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이상 아버지는 마츠코를 향해 웃어주지 않았다.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는 개쓰레기같은 작가를 사랑할때도 마츠코는 최선을 다해 돈을 구해왔다. 그런 작가는 마츠코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이 자살하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마츠코는 매순간 사랑을 주었고 그 남자들은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다. 마츠코는 그런 사랑을 받고 싶었다.

아이돌을 사랑해 편지를 한가득 써서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장면은 나에게 너무나 먹먹한 장면이다.

왜?라는 그 말이, 마츠코의 사랑이, 직접 만나지도 않았지만 티비 속 아이돌을 위한 마음 또한 되돌려 받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냐는 거겠지

마츠코의 조카 쇼의 여자친구는 이별을 고할 때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의 가치라는  누군가에게  받았느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냐는 거겠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말하고 싶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마츠코는 받는 사랑을 위해 살았고 그 사랑은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었다.

마츠코는 사랑의 힘이라는 게 있었는데, 사랑을 위해 교도소에서도 열심히 살았고 사랑 덕분에 인생이 끝나는 순간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다만, 그 사랑이 받기 위한 사랑이여서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마츠코가 자신을 사랑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말을 직접 생각해보니 나 또한 그렇다. 나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남에게 받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한 사랑을.

이런 것들이 종합해서 생각하니 마츠코가 너무나 공감갔다.

우리는 남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너무나 많은 애를 쓰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남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한다. 사랑받고 싶어서.

그 누구도 마츠코에게 뭐라 할 수 없다.

우리 안에도 마츠코가 있으니까. 그런 마츠코를 우린 사랑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쿠미에 대해서


마츠코는 '다녀왔습니다'를 혼자사는 집에서도 계속 말한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린 듯이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마츠코를 기다리지 않았다. 쿠미만 제외하곤.

쿠미는 죽을 때, '언니 잘 돌아왔어'라고 말하고 죽는다.

쿠미는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모두 다 가져간 인물이다. 마츠코가 제일 싫어하지만 가장 사랑했던 인물인데.

어쩌면 마츠코는 옆에 꾸준히 사랑했던 쿠미를 잊은 것 같았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이를 미워하게 된 마츠코도 너무나 안타까웠고 언니를 계속 사랑한 쿠미도 마음이 아팠다.

쿠미는 죽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나는 쿠미를 보면서 어쩌면 쿠미는 마츠코 자기자신의 투영이라고도 생각했다.

계속 마츠코가 자신을 사랑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자기자신. 마음 속에 있는 자아라고 표현하면 될까?

설명이 잘 되지 않지만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팠고 결국 쿠미를 향해 걸어가는 마츠코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쿠미는 끝까지 마츠코를 기다렸다.






이 영화는 좋은 대사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른이 되었을 때의 그 허무함, 공허함, 울분 등 어릴 적 상상했던 그 모습이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해서

잘 표현했다. 그래서 두고 두고 볼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도 울컥한 감정이 올라온다.

마츠코의 일생은 혐오스럽지 않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젠 너를 사랑해줘, 마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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