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정 Aug 29. 2020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텍사스로부터.

지루함으로부터 살아남는 법




“사는 게 지루하군. 왕자면 뭐 하나, 재미가 없는데”


삶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사냥을 떠나 새로운 섬으로의 모험을 떠난 Sang Nila Utama 왕자는 ‘테마섹’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싱가포르 섬을 발견했다고 한다. 연도가 확실치 않은 전설 속 이야기다. 이 대단한 발견의 모태는 어쩌면 ‘지루함’ 일 수도 있는데, 기이한 사자 형상의 짐승과 배가 뒤집어질 파도에도 아랑곳 않고 떠났다고 한다. 심지어 보석이 잔뜩 박힌 왕관도 바다에 내 버리고 혈혈단신 모험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루함을 견딘다는 게, 물질과 지위와 전혀 상관없는 원초적 괴로움 일지도 모른다.


지금 인류는 조건을 막론하고 ‘지루함’과 싸우는 듯 보인다. 반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사태 앞에, 저 왕자처럼 지루해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지 모른다. 이미 일상으로 돌아간 국가들도 많지만, 모든 걸 셧다운 시켜버렸는데도 회복될 기미가 없는 이 미국 시골 도시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지루함’과의 싸움이다. 이 지긋지긋한 지루함 앞에서는 평화, 조용함, 보석과 넓은 집과 뜰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왕자처럼 모든 걸 바다에 내던져야 한다고 하여도, 제발 이 사태가 없는 새 세계로 가고 싶은 것이다.  



텍사스로 오다.



지난해, 뉴욕에서 몇 달 지내자마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졌고 개인적인 이유로 텍사스로 옮겨 왔다. 뉴욕은 칼바람이 부는 영하의 날씨였지만, 텍사스는 늦가을 정도의 적당한 쌀쌀함이 감돌았다. 달라스 국제공항은 그야말로 소박했다. 덩치는 커도, 마치 우리나라 중소 도시의 지방 공항에 간 듯 단출한 시스템이었다. 한국인 입국자가 아주 많았고, 몇 차선 도로인지 셀 수도 없이 넓고 광활한 도로들을 달려 새로운 터전으로 왔다.


남한의 6배 크기,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벌판, 간혹 개발이 한창이라 새 건물이 지어지고 한인타운이 들어서지만 그래도 여전히 ‘벌판’ 같은 드넓은 도시. 빈약한 고층빌딩은 아주 특수한 다운타운에만 있고, 대부분은 벌판에 ‘지붕들’이 쫙 놓인 주거지다. 한때는 총잡이와 카우보이와 소떼가 있었고, 서부영화가 시대를 풍미했으며, 미국에서 유일하게 ‘나라’로 독립했던 역사가 있는 ‘론스타국’(Loan star, 텍사스가 나라이던 시절 사용하던 국기에서 따온 별명)이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미국의 어느 지방 시골 도시, 지역색이 강하고 집값이 싼, 운전을 하다가 지쳐서 쓰러진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뭐 자원이나 기술에 대한 이야기, 유명한 메이저리그 선수가 산다는 일화들이 있지만 그저 젊은이에겐 지겹도록 넓고, 조용하고, 지루하며, 덥고, 유행에 더디며, 운전을 거듭해야 하는 덩치만 큰 도시 아닌가.


매일 문 밖을 나서면 있었던 고층빌딩, 빼곡하게 들어선 상업지구들, 가게마다 흘러나오던 트렌디한 노래들, 바쁜 사람들, 지하철과 페리와 버스와 택시와 우버와 불법 택시가 뒤섞여 파노라마를 이루던 ‘뉴욕’과 전혀 다른, 벌판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다. 지방답게 사람들은 적당히 친절하고 말이 많다. 텍사스 사투리라고 여길만한 어투가 있으며, 덩치 큰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도로 곳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여기저기 트럭이 달리는 걸 보니 비로소 ‘아, 다른 대륙에 왔구나’ 싶었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과 동떨어진 섬

텍사스는 내륙 땅이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외딴섬’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이른바 ‘Walkability’(걷기에 알맞은)의 가치가 부각되는 도시도 아니거니와, 미디어와 유행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젊은 도시’도 아닌 듯했다.

언젠가 사진 작업을 위한 모델을 구하기 위해 에이전시를 찾아보았는데, 어느 벌판 같은 소도시에 덩그러니 1층짜리 사무실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부동산 같은 외관을 하고서 말이다) 그마저도 ‘뉴욕’과 ‘할리우드’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 순박한 ‘시골 소녀들’이 거쳐가는 조그만 에이전시 같았다. 포트폴리오 역시 과거 2000년대 초반 청바지 패션을 보는 듯 약간은 시대에 뒤쳐져 보이는 게 기분 탓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의도 방송계와 강남 홍대 입성을 위해 기웃대는 사람들이 포진한, 강원도 시내 어느 자그마한 ‘연기학원’을 간 느낌이랄까.

미디어와 연극 콘서트계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텍사스 주의 오케스트라는 유명하다고 하지만, 사실상 케이팝이 미국을 흔들고 인터넷으로도 전 세계 음악과 공연 그리고 21세기의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는 시대에 ‘클래식이 아닌’ 다른 분야의 예술도 동반성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카우보이풍 의상을 파는 곳이라던지, 말 농장주가 입을 듯 보이는 지독한 ‘텍산’(텍사스인) 패션은 그렇다 치고, 주요 백화점에 포진해 있는 브랜드와 신상 비율만 봐도 유행에 민감한 도시는 아닌 듯했다. 텍사스는 미디어와 예술업계가 약한 도시임이 분명해 보였다.




뉴욕을 걸으면서 느꼈던 간편함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땅의 크기’나 ‘기름이 나는 것’ 등의 두루뭉술한 이유가 아닌, 삶의 인프라와 문화 수준이 ‘살 만한 도시’를 결정짓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오직 걸으면서 의 식 주 쇼핑 미디어 공연 예술 국제기구 관공서 각 인종들의 타운을 모두 만날 수 있었던 뉴욕의 도시 인프라, 매일 터지던 브로드웨이의 커튼콜 소리, 전 세계가 주목하는 뉴스 프로그램들이 생방송으로 녹화 중인 타임스퀘어, 지하철의 버스킹마저도 세계적인 가수 못지않았던 풍족함, 무료 전시와 예술공간들, 10불 내외에 해결 가능한 푸드트럭들과 전 세계의 맛집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백발을 휘날리며 새빨간 하이힐을 신고 건너던 뉴요커들, 사람이 아닌 엘프들의 모임 같았던 패션위크 모델 오디션 현장의 진풍경들, 무심코 공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만난 사람이 사라 제시카 파커이며, 트럼프 타워 앞에서 ‘New York New york’ 노래를 하며 도네이션을 도모하던 흑인 가수, 밤 열두 시가 넘어도 대낮 같던 네온사인들, 우연히 만난 길거리 포토그래퍼에게 찍었던 사진들, 흔쾌히 스트리트 모델이 되어주는 사람들, 다이아몬드 거리에서부터 풍겨 나오던 리틀 이태리의 피자 굽는 냄새, 차이나타운의 활기, 월스트리트의 빌딩 숲, 15분마다 오가던 총천연색의 페리들, 물가 위로 모여들던 새들과 쉴 새 없이 터지던 카메라 세례들. 이 모든 걸 그저 ‘걸으며’ 누렸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언젠가 내가 텍사스에 물들어버려 미디어와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채 늙어가면 어쩌나 하는 볼멘소리까지 나오게 했다. 실현 가능성은 적지만, 그 정도의 공포감이 몰려들 정도의 ‘지역색’ ‘다소 느리고 넓고 평화로운’ 시골의 느낌이 나의 젊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현재 텍사스의 낮은 집값과 성장기회를 엿보고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은 집값이 비싼 뉴욕, LA, 그리고 물가에 시달려온 타주 이주자들이다. 이들은 처음에 호기심으로 텍사스를 왔다가, 결국엔 인터넷 페이지에 ‘텍사스 좋은 줄 알고 왔는데 할 게 없네요’ ‘너무 지루하네요’ 같은 말만 남기고는, 2-3년 안에 다시 떠난다는 게 정설이 되었을 정도다. 적응을 못해서다. 텍사스인 일부는 자유분방한 LA에서 온 이주민을 꺼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아무래도 성, 문화, 생활 방식의 자유화가 이 평화로운 시골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인 마트에는 매주 두꺼운 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만큼 많아 보이는 교회 광고, 과거 연변에서 보았던 듯 한 색감과 폰트의 업체 광고 이미지, 개인적 스텐스가 다분한 칼럼들과 이미 며칠 전 포털사이트를 휩쓸고 갔던 기사의 재탕, 이른바 ‘우리까이’ 라고 불리는 기사 재생산, 간혹 믿을 수 없게도 상대 업체를 까내리는 상소문과 소소한 불륜 스캔들 기사 등이 있었다. 한쪽에는 ‘주말에 갈만한 곳’을 소개하며 차로 4시간 반을 달려야만 나오는 (왕복 10시간 임박하는) 근처 바닷가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마스크를 쓰는 게 의무화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른바 ‘차이나 타운’에서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1월부터 마스크, 장화, 장갑, 고글을 쓰고 다녔고, 텍사스에서 제일 처음 유리 판막 이를 설치한 곳도 결국 중국 슈퍼마켓이었다. 이들은 아무도 사가지 않는 마스크를 미리 사기 시작했고, 한발 늦은 한인들은 그걸 조금 더 비싼 가격에 샀다. 열 발 늦은 백인들은 마스크가 없어 손수건 따위로 입을 막고 다녀야 했다.


한인 사회의 반응은 조금 특이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이주민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스크를 쓰고, 한국의 상황을 주시하며 미국의 변화를 예견했다. 그러나 자신을 ‘텍산’ (텍사스인)이라고 소개할 정도의 부심을 가진 ‘반쪽짜리 한국인’들은 백인 상류층 코스프레를 하며 트럼프의 ‘오더’를 기다리며 ‘노 마스크’ 상태로 버텼지만, 결국 때는 오고야 말았다. ‘판데믹’ 상황 말이다.



안 그래도 ‘갈 데 없는’ 텍사스에서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지루함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새 한 마리 없는 도로 밖 풍경에, 이젠 개미 한 마리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주지사는 비즈니스를 급하게 오픈했다가 하루에도 4천여 명씩 확진자가 생기는 통에 다시 문을 닫으려는 중이고, 교육부 장관은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왔을 때 코로나에 걸린다는 데이터는 없습니다’ 라며 (인류 최초의 ‘코로나 사태’의 데이터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학교를 연다고 했다.


미 정부에서는 각 용도에 따라 600불, 1200불 등으로 나누어 지원금을 배포했고, 지원금이 입금되던 날 우편물이 뜯기는 사고, 밤새 파티를 여는 젊은이들, 마트에 동이 난 술, 기가 막힌 타이밍에 진행된 전자제품 업체와 식품업체의 세일, 실업급여가 더 좋다며 일을 그만둔 일부 사람들의 일화가 넘쳐났다. 총기는 동이 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욕망에 휴지를 모으는 사람도 있었다. 소독제나 마스크를 속여 팔다가 경찰에 신고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동양인 차별은 텍사스에서는 드물었다. 일단 모두 다 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타인을 맞닥뜨릴 상황이 많지 않으며, 백인 극보수 층 특유의 ‘친절함’은 겉으로 절대 험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흑인 시위가 확산되자, 코로나보다 흑인이 더 무섭다며 ‘차별에 역차별’을 가하는 동양인들도 생겼다. 한인타운의 어느 상점을 지나다가 ‘흑인 애들이 훔친 루이뷔통 싼값에 올라오면 살까?’ 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아침을 위해, 달콤한 밤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시대



간혹 재택근무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실직하거나 가게 문을 닫아 쉬고 있거나, 혹은 나처럼 신분 진행에 차질이 생겨 ‘백수’로 지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파트에는 새벽이 되도록 산책하는 사람들과 집에서 바비큐를 굽는 사람들, 밤새 떠드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일을 하지 않아도 실업급여를 받아 렌트비를 낸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코로나의 순기능 이라면서 가족과의 관계 개선, 휴식을 찾은 인생 등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을 위해, 달콤한 밤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시대였다.


낮과 밤이 바뀌고, 요일을 까먹어도 다음날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 시대, 재난지원금이나 실업수당이 들어왔다고 밤새 술을 사 마시고 이파리를 태우는 사람들의 시대, 그들이 깨부순 술병 조각을 밟고 피가 나면 마스크를 벗어 누르는 시대, 바깥 치장하는 일이 하등의 쓸모가 없어진 기분이라 집 안의 것들을 채우는데 골몰하는 시대, 요리와 인테리어와 금붙이와 현금에 골몰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성취감의 부재, 평화 중의 독


언젠가부터 나의 일기에 ‘지겨움’ ‘재미없음’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욕에 살 때에는 전혀 없었던 단어다. 다만 결혼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텍사스의 생활은 분명히 따분했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 어느 도심에서 매일 길을 걸으며 서점, 카페, 공방, 갤러리, 옷가게, 구경거리에 젖어 즐겁게 살다가 지방 어느 소도시의 주택 타운으로 이사를 갔다고 치자. 차를 타고 나가야만 가는 마켓, 서울보다 약간 모자란 상점들, 무언과 시대와 동떨어져 보이는 그 지방만의 특색들, 90년대에 샀을 법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트럭을 몰고 큰 개를 키우며 커피 한 잔 햄버거 하나를 먹기 위해 한참을 운전해 나와서는, 결국 차에서 내리지 않고 ‘드라이브 스루’를 해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 매일 밖을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취미거리를 탐방하던 나로서는, 텍사스라는 벌판이 주는 평화는 ‘위협’ 수준이었다. 자연이, 조용함이, 한적함이 결코 이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응을 위해 도서관 영어 프로그램에 지원해 다니고 있을 때였다. 남미,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인종이 다양했다. 대부분 여자였다. 공통점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를 데리러, 혹은 가정생활을 위해 차를 타고 쌩 사라진다는 것.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문장 만들기’는 육아, 살림, 남편 이야기뿐이라는 것이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관련 대학이나 커뮤니티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뉴욕 필름스쿨 입학을 준비해왔던 터인지, ‘이동거리’와 ‘비용’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개인 작업에 몰두하기로 했다. 다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자. 그런 것을 즐길만한 젊은 이들과 뭉치자.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모든 것은 ‘잠시 멈춤’ 상태가 된 것이다.



중간에 ‘싱가포르에서 태양을 보다’라는 그림책이 출간되어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긴 했지만, 이제 미국 사회에 적응해 나만의 바운더리를 확장할 시기였다. 사실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권할 수 없는 시대에 출간했다. 노파심에 ‘여행 갈 수 없을 때, 책으로 여행하세요’라는 얌체 같은 말을 홍보문구로 써 보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어디 실제로 ‘떠나는’ 것과 책으로 간접경험하는 것을 비교할까.


텍사스 생활은 묘한 아쉬움이 찾아오는 기분의 연속이었다. 이 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성취감의 부재’였다. 꼭 어느 직업군에 종사하며 노동의 대가를 받지 않아도 인간 본연의 자존감과 성취감을 채워줄 ‘일’이 필요했다.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온라인 레슨이었고, 선생님과 매일 ‘오늘은 또 뭐할까요’ ‘확진자가 몇 명 이라던데’ ‘지루해요’ 같은 한숨 나는 이야기를 나눴다.


요리를 완성해 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집안 살림이나 재테크에 관심을 가져보고, 사진을 찍는 취미를 다시 붙여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느낌. 그게 무엇일까? 그것을 찾느라 6개월을 허비했다.


결국, 슬리퍼 차림으로 투벅투벅 걸어 나가 읽을 수 있는 신간 도서들, 오랜 시간 투자하지 않아도 가볍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문화 예술의 인프라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향연 속에 느껴지는 적당한 긴장감, 그들과 섞이고 또 연합하여 꾀하는 활동들, 취미들, 프로젝트들, 우연한 만남들, 가볍게 떠날 수 있었던 여행들, 고소득이 아니라도, 거대하고 의로운 직업을 가지지 않았어도 충분히 즐거웠던 하루하루들. 그런 것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건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텍사스 때문이었을까.


어찌 되었건, 있는 동안에는 적응을 해야 한다.

즐거움, 삶의 이유, 매일의 성취감, 커리어와 꿈을 해 치치 않고도 분명히 이 사회에 흡수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텍사스의 너른 벌판을 보면서 끊임없이 되물었다.



어쩌다가 우리는 ‘텍사스’를 이렇게 부르게 됐을까.



이른바 '텍사스촌'이라고 불리는 윤락가 관련 기사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다가온 궁금증, 왜 텍사스라는 지명이 윤락가를 지칭하는 속어가 된 것일까에 대한 물음이 떠올랐다. 마치 ‘홍콩간다’로 대변되는 홍콩의 또 다른 이미지처럼.


이른바 ‘청량리 텍사스촌’ '텍사스 미아리’ 같은 말의 어원을 찾아보니 혹자들은 텍사스의 지형과 관계있다고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한보다 6배가 큰 텍사스의 지형을 굳이 그 동네에 비유해 붙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옛 서부영화에 등장했던 텍사스 지역 술집에는 1층에선 술을 팔고 2층에서는 접대부가 기거하는 형태로 운영되었기에 거기에 빗댄 것이라는 말이 더 그럴듯하다. 나무로 된 문을 슬쩍 밀고 들어오는 총을 멘 카우보이, 그가 벌컥벌컥 마셔대는 오크통의 술, 그리고 관능적인 잡부가 나와 시중을 드는 그런 영화 속 모습 말이다.



또 미군부대가 우리나라에 휩쓸려 들어와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던 시절, 막연히 미국이라 하면 뉴욕, 텍사스,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같은 유명 도시의 지명부터 떠올리기에 어쩌다가 얻어걸린 게 하필 ‘텍사스’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궁금증이 증폭하여 혹여나 지금도 그런 서부시대의 술집이 있나 검색해 보았다. 모델급 서버들이 일하기로 유명한 ‘후터스’ 같은 업체는 이미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대중적 업체였다. 몇몇 술집과 후카(물담배)를 하는 가게들의 사진은 바깥이 어두웠다. 그중에는 한인이 세운 듯 한 노골적인 이름의 업체도 몇 개도 보였는데, 놀랍게도 ‘아가씨 완비’ ‘한국 스타일의 룸’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코로나도 비켜간 성역이었다. 이를테면 텍사스 안에 있는 진짜 ‘텍사스촌’ 같은 느낌이었다. 괜히 검색했다 싶었다.



창밖이 벌판이라는 것.


어쩌면 요양병원에 들어와 창밖을 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나름 아파트에서 젊은 이들을 마주치며 손쉽게 상점들에 드나들다가, 하우스에 들어가 살면 정말로 개미 한 마리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당연히 쇼핑이나 밥 한 끼, 커피 한 잔을 위해서는 차를 타고 멀리 나가야만 한다.


궁궐 같은 집에서, 지루한 천국을 누리며 살 것인가.

소박한 한 칸에서, 도시의 인프라를 누리며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가 계속해서 ‘텍사스 살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뮤지컬 렌트처럼,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처럼 맨해튼의 환상을 쫒아 간 젊은이들이라면 당연히 뉴욕을 택했겠지만 지금 내 짝꿍의 머릿속엔 은퇴 이후의 삶까지 그려지고 있는 상황이라 설득이 쉽지 않을 듯하다. 어느 격정적이고 타당한 ‘킥’ 이 될만한 이유가 없다면 말이다. 그 이유를 만들기 위해, 다시 도시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나? 혹여나 '집'이 나를 이 시골에 영원히 묶어놓을 발판이 될까 두려운 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사자’를 발견하고 가슴이 뛸 때까지



8월이 되자 텍사스는 화씨 100도를 넘어갔다. 한국으로 치면 40도를 웃도는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다. 슬슬 경제활동의 고삐를 푸는 조짐이 보이자 쇼핑몰, 식당, 술집, 수영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지노에는 마스크를 쓰면 돈을 준다는 이벤트를 열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젊은이들은 ‘코로나 파티’를 열었다. 신나게 모여 놀다가 누군가 먼저 걸리면 돈을 주는 것이었다. 음모론도 피어났다. ‘코로나는 가짜다’부터 기독교발 황당무계 정치논리까지 다양했다. 한인신문에는 한국이 코로나 좀 이겨냈다고 으스댈 필요 없고, (우리) 미국과 트럼프를 믿어보자는 뉘앙스의 칼럼이 올라왔다.


여전히 갈 곳은 없었다. 테이블이 오픈되었지만 사람들을 신경 쓰며 열이 펄펄 끓는 테라스에서 빠르게 먹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4천 명씩 확진자가 생기는 곳이라 분명 그 공포는 무시할 수 없었다.


‘여행의 부재’ 그리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 외국어 공부, 색다른 외국 음식, 평일 오전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다니는 텍사스 동네 탐방을 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아주 소극적이지만 일에 대한 계획들도 다시 세웠다. 여전히 갈 데가 없어 발을 굴리고 지루해 몸을 베베 꼬았고, 어딜 가도 내가 다닌 다른 도시에 못 미치는 매력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소재 고갈이나 인맥 쌓기의 한계, 인프라 부족에 시달리는 날의 연속이었다.



Sang Nila Utama 왕자가 발견했다는 사자 같은 기이한 동물, 그로 인해 지루한 삶을 스스로 박차고 새 섬으로 떠난 모험기는 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물론 오늘도 40도를 웃도는 더위에,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도 끝이 없는 벌판에, 무엇을 해도 무엇을 먹어도 흥이 나지 않는 이 도시에 ‘한숨’ 뿐이지만, 분명 어딘가의 나의 가슴을 뛰게 할 ‘사자’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나는 산다.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 모르지만 오늘도 나는 걷는다고.


뭐, 그러다 정 못 견디면

청춘의 혈기 부리며 박차고 떠나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하루에도 수천명 확진자에 수백명 사망자가 발생하는 ‘미국발 여행자’를 받아주는 국가가 그리 많지 않으며, 자가격리부터 여의치 않은 신분적 상황이 많이 남았지만 말이다.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궁궐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보다야 낫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그 답을 찾는다.

아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날개를 장착하고 떠날 준비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