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의 뉴욕생활 이야기
“특정 나라나 인종에 대해 편견을 가지면 안 돼. 깨어진 틈에서도 꽃은 피고, 저마다의 문화와 사정이 있으며, 쓰레기더미 안에서도 고귀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구!”
제일 좋아하는 언어나 음식들은 중화권과 동남아시아, 가보고 싶은 곳은 인도 멕시코 러시아,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필리핀 가요, 거주해 보고 싶은 곳은 몽골,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남미와 아프리카 독일 친구, 심지어는 북한도 관심 있는 내가 자주 떠들던 말이었다.
나의 특기는 ‘인류애’. 특정 나라나 인종이나 음식에 대한 편견 없음. 그게 나였다. 소설 쓰고 여행서 쓰는, 호기심과 인류애 덩어리인, 언어수집이 취미인 여자.
그런 나에게 뉴욕은 최적의 거주지였다. 인류애를 ‘플렉스’ 하기에 최적화된 성지였다. 눈만 뜨면 만나는 게 이민자들이고, 다양한 외국 음식점, 환상적인 거리 풍경의 하모니, 이방인에게 관대한 문화와 이민자에게 편안한 시스템. 정말이지 뉴욕 말고는 이런 뮤지컬 같은 일상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섞여사는 ‘우리들’을 공평히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미국 이민 7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 겪은 몇몇 사건은 나의 굳건했던 인류애의 신념을 살살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민자가 이룩한 거대한 멜팅팟 뉴욕에서 사랑과 애정을 잃고 잠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의 일화를 나누고 싶다. (궁극적으론 그 인류애를 다시 회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작년에 겪은 일이다. 나는 이사를 앞두고 살고 있는 집을 내놓았다. 몇 개의 오퍼를 받았는데, 어느 민족 사람들이 연락을 하더니 “우리가 꼭 사겠다. 적정 가격에 사겠다. 약속한다“며 다른 오퍼는 모두 취소하고 자신들과 계약을 하자고 했다. 그 당시 부동산 업계 사람들은 특정 인종과의 비즈니스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거절을 하라고 했지만, 순수했던 나는(?) 집을 빨리 팔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집에 다녀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애 상실의 서막은 시작됐다. 집을 보겠다고 한 번 다녀가면 열 명은 기본이었다. 미국에서는 미리 중개인을 통해 예약을 하고, 하자가 없는 이상 불시로 집을 찾아와 재차 확인할 수는 없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집에 방문하려 했다. 이미 몇 번은 다녀갔는데도.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조카자식들까지 줄줄이 왔다 간 날이면 이국의 향신료 냄새가 났다. 거기까진 좋았다. 특정 민족의 음식이나 생활방식 때문에 나는 체취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나 역시 마늘냄새가 날 수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여기저기 열었다 닫은 냉장고 그리고 열었다 닫은 서랍장 등 신경 쓰이는 게 하나 둘이 아니었다. 언제는 향초 같은 걸 피우고 뭘 했는지, 잿가루와 희한한 연기도 맡았는데 만일 불이라도 났다면 어떻게 했을지 아찔해진다. 나는 그들이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몰라 매번 귀중품이나 개인정보가 담긴 것들을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때우는 데 이골이 났다.
가장 큰 문제는, 계약금을 보내놓고 분명히 사겠다고 단언해 놓고는 결국 석 달이나 집 계약을 자꾸 미루며 피를 말렸다. 석 달 동안 연락을 취하고, 집에 언제 올지 몰라 청소를 하고 이사준비를 하고 또 미루느라 피가 말렸다. 급기야는 ‘식탁, 서랍장, 냉장고, 세탁기를 놓고 가지 않으면 집을 안 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수십 가지의 흠을 찾아내 당장 고쳐놓으라고 보낸 파일도 황당했다. 그 흠이란, 정원의 나뭇가지가 너무 길다든지 계단에 두 명이 함께 올라가니 너무 좁아서 넘어지겠더라 하는 너무나 사소하고 말이 안 되는 것뿐이었다.
석 달이 지난 넉 달이 되어갈 때, 결국엔 계약을 못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허탈했다. 무려 석 달간 우리를 어디도 가지 못하게 해 놓고 결국 ‘돈이 없어 못 사겠다’며 계약금을 돌려달라는 싸움을 걸었다. 그들이 대동한 감정사, 변호사, 집 매매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은 다 자신들과 같은 인종이었다. 마치 어떻게 하면 타인의 피를 말리고, 돈을 깎으며, 싸움에서 이기는지 궁리하는 집단 같이 느껴졌다.
계약금 반환에 응하지 않으니 거짓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을 음해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출처가 불분명했지만 짐작으로 그들인 것을 알았다. 느낌일 뿐이지만, 이상하게 그들과 얽혔던 시점에 유독 보험사기 편지나 스캠 메일을 많이 받았다. 매일매일 피가 말렸고, 두통이었다.
나는 결국 모든 과정을 이겨내고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집을 팔았지만, 시간과 돈 그리고 건강을 잃을 만큼 시달렸다. 그들과 얽혀있던 석 달간의 시간은 미국 이민인생 최대의 위기였던 것 같다.
후에,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이들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봤다. 개인 경험을 민족 전체의 평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미국 내에서 그들은 이미 악명 높은 ‘브레인’들이었다. 학교에서, 관공서에서, 회사에서, 매매나 거래를 하다가, 식당에서, 채용할 때, 마트에서 물건을 사다가 겪은 황당한 일화들이 쏟아졌다. 손해는 절대 참지 않으며 무엇이든 정가로 구매하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한단다. 구입과 환불이 취미이며 물건이나 프로그램을 공짜로 누리는 법을 공유한다고. 원하는 결과를 위해 무엇이든 감행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절대, 돈 문제에 얽히면 안 된다고.
한때 나는 그들의 나라에 호감을 가지고 여행 계획까지 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나의 거룩한 인류애를 박살 내버려 이제는 그 좋아하던 ㅋㄹ도 먹지 않는 편견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 좋아하던 댄스 영화도 못 보게 되었다. 그들이 떠올라 화가 나기 때문이다.
평소 난민 문제에 있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도 옛날에는 그러한 입장이었고, 또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짊어진 난제에 결국 나 같은 이방인은 같은 이방인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수용하는 건 결국 ‘인류애’의 숭고함이 주체가 되어야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요즘 공원에 간 나는 매일 실망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곳에서 빨래를 하고 벤치마다 널어놓는 사람들, 일을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낮부터 술 취해 누워있는 모습들, 공중 화장실에 본인들 쓰레기를 무덤처럼 쌓아놓는 것, 초등학생쯤 되는 여자아이를 사람 많은 곳에서 홀딱 벗겨 옷을 갈아입히던 난민 엄마 (아마도 그들 나라에서는 이런 것이 문제 되지 않는 건지), 노상방뇨와 침 뱉기, 길마다 꽉 들어찬 비허가 행상들, 정체 모를 튀김 음식이나 파리가 붙은 과일꼬치를 파는 모습… 더군다나 공원 벤치는 오전부터 시간을 죽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 내가 앉을자리는 늘 없었다. 그마저도 쓰레기더미와 알 수 없는 음식자국이 뭍은 벤치였다. 간혹 청소부나 가게 직원들이 비켜달라고 하는 순간 영어를 모른다며 어깨를 들썩이고 계속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 밖에도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쓰는 사람이 되려 나에게 ‘왜 못 알아듣냐’면서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또는 슈퍼마켓에서 생선이며 고기며 맨손으로 뒤적이며 사가는 이민자들, 나에게 다짜고짜 외국어로 말을 걸고 팔을 잡는 무례한 사람들, 세금은 내지 않으면서 공권력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며 시위하던 일부 이민자 집단들, 나를 화장실 쪽 테이블로 안내하더니 메뉴판보다 훨씬 비싼 메뉴를 계산서에 찍어놓고는 ‘몰랐다’고 하던 레스토랑, 카페에서 나를 위협하던 노숙자, 전봇대에 붙어있는 아동 범죄자 사진들과 그 아래 적힌 외국언어 이름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벽 3시까지 시끄러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술파티를 하다가 컴플레인을 하니 영어를 못 한다며 어깨를 으쓱이던 이웃… 그런 작은 경험들이 쌓여 나의 인내를 시험하고 결국엔 인류애 상실의 허탈함을 겪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나는 원주민과 소수민족을 이야기를 사랑하던, 소위 ‘세계테마기행’으로 길들여진 K-여행작가인데… 뉴욕 어느 뒷골목이나 부촌이나 슬럼가나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던 사람인데… 나는 몽골에 가서 낙타 위에 올라가 찌든 냄새가 나는 스카프를 두르고도 행복해하는 인간이었는데… 노숙자나 백만장자나 매 한 가지 뉴요커라며 언제나 장점을 보고 즐거움을 찾으려던 뉴욕의 열성 팬이었는데… 무엇보다 인류애 덩어리며 편견 제로에 도전하는 박애주의자였는데… 몇몇 경험 때문에 한 나라의 거대한 문화유산까지 편견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그래서 인종차별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민족은 절대 안 된다’ ‘난민 수용 찬반‘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다. 여기엔 그 어떤 정치적인 의견도 없다. 여전히 한국인 혹은 아시안을 향한 총질과 곁눈질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방인’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또 나를 알게 모르게 도와준 미국인들, 고마운 이민자들, 착하고 순하던 난민들도 있었기 때문에 너무 급히 속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허공에다 대고 외치고 싶다.
“여러분! 저의 잃어버린 인류애를 위해 조금만 노력해 줘요. 모든 세계를 공평하게 사랑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요. 다시 I Love New York을 외치고 싶다고요!”
다시 돌아가고 싶다.
어느 민족과 어느 사람들에게도 편견이 없던 나로. 아침에 눈을 뜨면 뉴욕에서 겪을 일상이 기대되고, 밖에 나갈 때면 늘 눈이 반짝였던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