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서재, 성공 경험
학습동기 성공한 방법 Top3
1. 동료 효과
작년에 어떤 어머님이 강제로 학생을 학원에 등록시켰다. 어머니는 아이가 기본이 하나도 안 되어 있고 맨날 친구들하고 논다고 제대로 공부시켜 달라고 했다. 실제로 확인해보니 동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대책 없이 놀고 있었다.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아이들은 그게 더 심하다. 그러다 보니 고1 남학생이었지만 지적 능력은 중1 정도로 보였다. 그동안 공부를 전혀 안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이는 굉장히 불미스러운 표정으로 교실에 앉아 있었다. 공부를 시켜보니 한글도 삐뚤빼뚤 썼다. 설마 이 정도는 알겠지 하는 그 정도도 안 되어 있었다. He 다음에 have가 아니라 왜 has가 오는지 질문을 했다. 이럴 경우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난감하다. 지금 이 학생에게 당장 지식을 알려주는 것보다 학습에 대한 필요성을 스스로 인지시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세계 2차 대전 중 포로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사상적 전환을 시도했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스스로 말하고 글로 써보게 하는 방법이었다. 예컨대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다 온 사람들에게 자유경제주의에 대한 장단점을 글로 쓰고 말하게 하는 식이다. 연구 결과 이 방법이 그들의 사상을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즉, 본인 스스로 어떤 내용에 대해서 말하고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설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알려주고 싶으면 스스로 그 말을 하게 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즐겨 쓴다. 그리고 지금까지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놀면 불안하잖아 차라리 공부하는 게 속 편해.” → “평소에 놀 때 불안하지 않니?”
“공부 안 하는 친구들하고 놀지 마라” → “주변에 노는 친구들 보면 무슨 생각이 드니?”
“너 그러면 나중에 고생한다.” → “지금 공부 안 하는 친구들이 나중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런데 무턱대로 이런 말을 한 다고 아이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주변에 아이들이 다 노는데 이런 말을 한 다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맹모삼천이 나름 의미가 있는 방법이다. 환경이 달라지면 새로운 자극이 들어온다. 그래서 위에 맡은 고1 아이를 다른 반으로 옮겼다. 반을 바꾸자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이 달라졌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셈이다. 앞에 앉은 중2 여학생은 3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꼼짝없이 공부를 하고 옆에 중3 남학생 한 번에 단어를 300개씩 외워서 시험 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되면 할 말이 없다. 아무리 "공부해라. 너 그렇게 공부 안 해서 나중에 뭐 할래." 얘기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더 와 닿는다. 그리고 조금씩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더 정확히 앉아서 공부하는 게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이다. 나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도 맞지만 모이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기도 한다.
2. 거실을 서재로
방에서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게임만 하는 두 아들 때문에 어머니가 참다 참다 드디어 폭발했다. 휴대폰을 압수하고 컴퓨터를 거실로 옮겼다. 아이들은 당황했고 부모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거실에서 컴퓨터로 게임하고 TV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혼나면 며칠 눈치 보다가 다시 슬금슬금 컴퓨터에, 소파에 앉았다. 결국 어머니는 배수진을 친다. TV를 팔아버린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와 아들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여보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맞아. 엄마 이런다고 공부하게 될 것 같지 않아.”
“맞아요. 차라리 놀 때 놀고 할 때 하는 게 더 효율적이에요.”
어머니는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TV를 없앤 자리에 서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화, 목, 토요일에 모든 가족이 모여서 공부하는 규칙을 정했다. 둘째 중학생은 하기 싫어도 그럭저럭 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첫째 고등학생은 완강히 저항했다. 억지로 앉혀 놓으니 학습 효율이 없다며 몸부림을 치고 축 늘어져서 침을 흘리면서 자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규칙을 고수했다. 학교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스스로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 공부가 된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형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당연히 화, 목, 토요일은 모여서 공부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둘 째는 시키지 않아도 시간만 나면 거실 서재에서 공부를 한다. 형도 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없이 같이 공부를 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TV를 팔았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하다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오늘 당장 TV를 팔 수 있다. 결국 의지의 문제다. 부모님의 의지가 확고하면 아이들은 불만이 있어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어쨌든 부모의 그들 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갈팡질팡하면 아이들은 그 틈을 귀신같이 찾아서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어디까지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방향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3. 성공경험
미국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은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강아지 두 마리를 각각의 통 안에 넣고 바닥에 전기를 흘려보냈다. A강아지는 바닥에 전기가 흐르자 금방 뛰쳐나왔다. 하지만 B강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닥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런 실험이 불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비슷한 실험이 공식적으로 행해졌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실험이었다. 이번에는 B강아지를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통에 넣고 바닥에 전기를 흘려보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B강아지는 그대로 전기를 맞으면서 앉아 있었다. 바로 뛰어나오면 되는 통인데 그냥 웅크리고 전기를 그대로 맞았다. 이전의 통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경험이 학습된 것이다. 마틴 셀리그만은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 명명했다.
예전에 중3 영포자를 만났다. 영어 울렁증이 심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중3이면 아직 공부할 날이 창창인데 벌써 영어를 포기하는 게 맞나 싶어서 아이를 불러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어를 보자마자 아이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이의 언어적 감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는 영어 유치원을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계속 유명한 학원의 상위권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 흔히 유명한 학원에 다니면 그 자체가 자랑거리가 된다. 어릴 때는 별 차이가 없었겠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서 성적으로 경쟁을 해야 할 시기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본인의 수준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계속 어려운 수업만 듣느라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다. 확인해보니 아이의 기억 속에 영어는 잘 모른다고 혼나고 지적받고 비교당해서 하기 싫은 과목이었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너는 이것도 모르냐?"
위의 강아지에게 마틴 셀리그만은 한 가지 실험을 더 했다. 나갈 수 있는 통 안에서도 계속 전기를 맞고 있는 B강아지에게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처음에는 전기가 왔을 때 나간다는 개념이 없는 강아지를 나가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데 번 반복하니 이내 쉽게 나가게 되었다. 이전의 학습된 무기력을 털고 정상적으로 행동하는데 필요한 것이 성공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속는 셈 치고 6개월만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이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과정부터 다시 복습하면서 올라왔다. 국가에서 지정한 초등 필수 어휘 800이 있다. 아이는 이것들 중에서도 모르는 부분이 꽤 있었다. 다시 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중1, 중2, 중3 과정을 복습하고 고등학교 영어를 가르치자 아이의 상태는 전보다 눈에 띄기 호전되었다.
실패만 경험했던 영어에서 성공 경험을 느끼게 해 주어 부정적인 감정을 상쇄시킨 것이다. 작은 성공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신감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도 도전할 용기를 낸다. 아이가 무기력해 보이는 경우 어릴 때를 떠올려보자. 어릴 적에는 호기심도 강하고 밝고 긍정적이었는데 어느새 눈빛이 혼탁해지고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다면 단순히 사춘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본인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을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본적인 부분도 모르면서 고난도 문제를 풀려고 욕심을 부리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에필로그 - 학습 동기의 배신
새벽 3시 반에 장문의 이메일이 왔다. 띄어쓰기, 맞춤법이 마구 틀린 것으로 보아 마음이 상당히 급한 것처럼 보였다. 이메일의 내용을 요약하면 교사가 되겠다고 그동안 공부에만 매진하던 고3 딸이 갑자기 공부를 안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학생들이 할 법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 학생은 학교도 안 가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교사를 지망하던 공부 잘하던 딸이 갑자기 공부를 안 하자 어머님이 충격에 쓰러졌다. 교사를 꿈꾸던 그 학생은 어머니에겐 전부였을 수도 있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학습동기가 매우 강력했던 만큼 그것을 잃었을 때 상실감도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강력한 학습동기를 가지고 미친 듯이 공부하는 것을 기대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날카로운 칼로 물건을 잘 자를 수 있지만 칼날이 나에게로 향하면 큰 사고가 난다. 공부하는 데 학습동기가 전부는 아니다. 학습동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기가 없어도 최소한의 학습량을 유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