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나도 공감받고 싶다는 것
관세사 2차 시험을 앞두고 대략 6개월 정도는 주말마다 서울에 있는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봤다.
난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로 올라가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쳤는데, 시험이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점심시간이 있었다.
홀로 공부하는 처지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도 한 명 만들기 위해 같은 대학교 점퍼를 입고 온 남학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2 유예생으로 본인도 집 근처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주말마다 시험을 보러 학원으로 온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매주 토요일에 함께 점심을 먹는 사이가 되었고,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그 친구도 나처럼 말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터라 식사 시간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딱 하나 나와 다른 점은 그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주로 대화의 소재를 던짐으로써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 그 속에서 또 다른 대화 소재를 찾아 이야기를 이어가는 나와는 달리, 그 친구 같은 경우 딱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우리의 대화는 주로 이렇게 흘러갔다. (기억나는 대화를 각색한 것)
-나: 아 00어 전공이시군요. 그럼 00 나라로 유학 갔다 오셨나요??
-친구: 네. 00 나라로 다녀왔어요. 거기서 ~~~~~~~ 했어요.
-나: 와 진짜 재밌었겠어요. 여행도 많이 다녀오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셨네요. 저도 포르투갈로 유학 다녀왔는데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어요.
-친구: 음~..... (정적)
-나: 00어는 배우기 어렵다면서요? 어떤 점이 가장 어려운가요??
-친구: 저도 아직 잘 몰라요. 근데 거기서 생활하면서 ~~~~~~해서 많이 늘긴 했는데, 여전히 어렵긴 하죠.
-나: 아 그러시구나. 역시 직접 겪으면서 공부하는 게 빨리 늘죠. 저도 포르투갈어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포르투갈 갔는데 동사변형이 가장 어렵긴 했지만 많이 쓸수록 늘더라고요.
-친구: ㅎㅎ(고개 끄덕끄덕).....
보통 나는 저런 대화 속에서 '그럼 포르투갈은 어때요?'라던지, '포어와 스페인어는 많이 비슷한가요?'라는 질문들을 받고, 거기서 파생된 다른 재밌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이 친구는 자기 이야기만 딱 하고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질문과 질문 사이에 길어지는 정적에 당황했지만 초면이라 아직 어색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본 4개월 간 매주 만나 식사를 함께한 결과, 그는 원래 그런 대화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는 것은 좋아해서 하는 말은 많지만 보통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끝나면 말을 하지 않거나 자신의 이야기(주로 여행얘기나 학교얘기)를 하는 것을 선호했다. 성격상 그런 이야기에는 리액션과 공감을 해주며 연관된 질문들을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관심도 재미도 없는 이런저런 걸 묻고 있자면 마치 물음표 살인마가 된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면접관이 된 것 같은 느낌이어서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처럼 독백 같은 대화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음을 알고 나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도 안부차 톡을 한번 했지만, 또 내가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에너지 낭비를 막기 위해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엔 마음도, 감정도 고갈되는 자원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집중해주지 않는다면 금방 에너지가 바닥나고 지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이 본인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표현처럼, 상대방에게 해주는 위로의 말은 사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고, 상대방에게 하는 공감은 실은 내가 받고 싶은 공감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공감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의미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상황과 생각을 이해하고, 감정에 동화되기도 하며 편하게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놓게끔 긴장을 완화시키는 이완제이다.
그래서 항상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이 나와 같은 공감의 태도를 가져줬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지만 그게 좀처럼 이뤄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점점 알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누구나 타인과 가까워지는 속도가 다르고 소통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마음을 많이 다치기도 했다. 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퍼주는 아주 피곤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사람에게 관심이나 정을 주지 않고 살아가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어도 늘 타인과의 대화와 어울림 속에서 힘을 얻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제는 그냥 나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연습 중이다.
그동안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세상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방식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천천히 상대방의 특성을 먼저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
진지한 대화를 좋아하는지, 가벼운 농담을 좋아하는지.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말을 걸어주는 것을 좋아하는지, 가만히 놔두는 것을 좋아하는지.
공감해 주는 걸 좋아하는지,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학원에서 만난 친구는 말을 듣는 것보단 하는 쪽을 좋아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아마 모든 말에 반응해 주기보단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관계에 있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분명 본인과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유 없이 상대방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해하기 힘든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득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선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대화가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해주는 윤활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 중심엔 공감과 리액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때로는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