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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봉파파 Apr 22. 2020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

우선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논하기 전에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실 교육이 무언가로부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교육의 본질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기인했다. 중세 이후 서구의 교육은 종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교육은 종교에 귀속되어 있었다.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교육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요청이 끊이질 않았고, 그 결과로 교육이 종교로부터 독립되어 본질을 경작하며 발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종교적 영향력에 더해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도 교육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교육이 종교와 정치에서 벗어나 교육 그 자체의 가치를 존중받게 된 것이다. 

교육이 종교에 독립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별 어려움 없이 체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아내는 절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고, 고등학교는 천주교를 기반으로 하는 미션스쿨을 졸업했다. 그러나 주말에는 절도, 성당도 찾지 않는다. 되려 학교에서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강요하면 안된다는 조항이 교육기본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육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며 모든 정치는 교육으로 수렴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사는 불행하게도 일제 치하에서 시작됐다. 황국의 신민이 되어야 자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교육의 이면에는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라는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어떠한가. 김일성이 뿔이 달려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시절에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민족 중흥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강요를 받았을 때에는 국가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산업자본을 축적하고 있을 시기였다. 그러니까 모든 교육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학교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민주시민의 기본적인 자질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곧 인간이 만든 정치체제 중 하나다. 우리는 학교에서 곧 정치체제를 학습하고 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그냥 현상이 그러하다. 우리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학습하지만 북한의 학생들은 김씨 일가를 우상화하는 기형적 사회주의를 학습한다. 정치는 결국 교육제도와 교육과정을 규정하게 되고, 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정책을 실현시킨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교육과정이 변화를 거듭했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정치권력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기 위해 무리한 힘을 썼다.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혼이 비정상이 되면 안된다는 신념으로 정책을 수행한 결과, 전국의 고등학교 중 단 한 곳만이 국정 교과서를 채택하기로 했으며 그마저도 학부모들의 반발로 결정을 번복했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은 이후 실패한 정책으로 종식됐지만, 정치권력이 교과서든 교육과정이든 교육과 관련된 무엇 하나를 바꾸려 마음을 먹으면 웬만한 저항으로는 그것을 막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교육이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영향력도 실로 막강하다. 정치체제가 아무리 민주주의라고 한들,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개개인이 없다면 그 체제는 곧 종식된다. 특히나 민주정치는 다른 정치체제에 비해 배우고 익혀야 실현이 가능하다. 존 듀이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교육이 민주사회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고 교육을 통해 사회구성원은 공동선에 참여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교육을 통해 정치체제는 유지될 수 있고, 교육이 없다면 사회유지와 제도의 존속이 불가능하다. 

교육과 정치는 결국 함께 굴러가는 톱니바퀴와 같을 수밖에 없다. 입시제도와 같은 교육적 논의가 정치의 주요 쟁점이 되고, 그러한 정치적 결과물이 또다시 정시와 학종 논란 등의 교육문제를 생산한다. 교육과 정치가 상호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존재하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교육과 관련해서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정치와 교육이 맞물려가는 현실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날의 정치는 과거처럼 소수의 신분이나 특권을 가진 계급에만 허용되지 않는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이 모든 의사결정을 독점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정치적 의사결정이나 입법된 법률이 특정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이 된다.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의사표현이 가능하고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의제가 설정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당’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세력을 얻어 정치적 의사결정까지 이룰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정치적인 집단이다. 정치문제에 대한 다툼이나 갈등은 곧 정당 간의 다툼이나 갈등으로 수렴하며 더 많은 시민의 동의를 얻은 정당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수용된다. 과거의 정치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정치였다면, 현대의 정치는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정당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가 논의할 정치적 중립성은 곧 ‘정당정치적 중립성’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교육은 정치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특정 정당의 주장대로 일방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영역이다. 가령 자유라는 가치를 옹호하는 보수정당이 있고 평등이라는 가치를 옹호하는 진보정당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교육은 일방적으로 자유라는 가치 혹은 평등이라는 가치만을 교육과정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이해했다면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한마디로 ‘무당파성’이라 할 수 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특정 권력으로부터 교육권을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마치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정치적 중립성이다. 현실적으로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무당파성을 넘어 지나친 해석에 사로잡혀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사는 그 어떤 정치적 의사표현이나 정치활동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게 많은 교사들의 현실 인식이다. 그러니까 무당파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비정치화를 요구받는달까? 

교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교육이 특정한 입장이나 특정한 방향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육이 선진화된 국가들은 하나같이 학생들에게 강조를 하는 요소가 있다. 바로 ‘비판’이다. 그대로 보지 말고 비판을 하라는 것이다.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특정한 주장이나 입장, 견해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나는 그것과 다른 주장이나 입장,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다. 비판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중립, 중립, 중립. 공무원, 특히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에 대한 눈초리는 매우 엄하기 때문에 교사가 자유롭게 논쟁을 수업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실정이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무당파성을 의미하여 기계적 중립으로 인한 특정한 입장과 방향을 설정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논의했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현실이 정치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는 교사와 학생들을 양성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원칙으로 돌아가보자. 교육이 모든 영역으로부터 중립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 그 자체의 본질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학교에서 하는 이상,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곧 정치에서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교육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재해석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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