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국제거리의 스타벅스에서 쓴 수기
짧은 여행의 마지막 날입니다. 비행기는 두 시간 넘게 연착한다고 합니다. 항공사에선 아침 일찍 연착 소식을 전해줬어요. 덕분에 전 오키나와에서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있는 오키나와 국제거리에서 공항까지는 넉넉잡아도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뜨였고, 저는 잠을 더 자보려고 아침 간식을 먹은 후에 최선을 다해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렸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줄곧 깨어있으니 하루가 길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직 공항으로 출발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습니다.
오키나와 여행의 마지막 날.
하루 일정을 통으로 비웠습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오늘 일과는 이런 식입니다. '밥을 먹어야겠어'라는 생각이 들면 밥을 사 먹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같은 길을 왔다 갔다 반복합니다. 뭔가 먹고 싶었던 게 있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근처의 상점 몇 군데를 들렀습니다. 여행자들이 모이는 국제거리엔 기념품 상점이 즐비합니다. 특별히 사고 싶은 건 없는데, 그래도 뭔가 사긴 삽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소금맛을 고릅니다. 오키나와에선 ‘Blue Seal’이라는 글씨를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는데, 그때가 바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타이밍입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는 국제거리 사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로 들어왔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서니, 방금까지 손님이 앉아있던 테라스 테이블이 지금은 비어있음을 발견합니다. 오늘 운이 좋습니다.
나는 테라스에 앉습니다. 그리고 방금 받은 돈키호테 상점 영수증을 꺼냅니다. 그 뒷면에 이 글을 적습니다. 한 바닥을 다 채워도 괜찮습니다. 영수증은 또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살면서 경험한 가장 쉬운 여행이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사람들은 친절했습니다. 해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고개를 들어볼까요?
2차선 도로 건너편엔 커다란 스테이크집이 세 가게 잇달아 있습니다. 차로를 따라 아담한 일본 차들이 지나가고, 공항행 버스도 지나갑니다. 대로변엔 야자나무가 늘어서 있습니다. 가로수는 가게 건물 3층 높이만큼 커다랗고, 야자수 잎사귀는 그만한 높이에서 흔들립니다.
오늘은 날이 흐린 데다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 테라스를 즐기기에 그만입니다.
나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에 잠옷 차림으로 여기 앉아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간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모습 그대로 돌아다니고 있는지 모를 테죠.
나는 노브라인데 그 또한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 내가 우산을 챙겨왔을까요?
우산을 챙겼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산을 들고 왔는지 쇼핑백을 뒤져볼 수도 있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쇼핑백엔 새로 산 옷이 들었습니다. 3벌이 들었는데, 하나 더 살 예정입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서 피팅룸에서 입어보지 못한 원피스가 있습니다.
‘나중에 입어보고 사야지, 입어보지 않아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과연 그 원피스를 내가 갖게 될까요? 미래는 도무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옵니다. 현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념품점을 둘러보며 ‘갖고 싶은데 없네, 환전해온 돈이 남을 것 같아.’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치곤 돈을 빠르게 사라지게 하는 재주를 부렸습니다. 시간도 그만큼 빠르게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음악에 귀 기울이며 여유를 부립니다.
카페에선 재즈가 흘러나옵니다.
오늘의 선곡은 훌륭합니다. 어제도 멋진 음악이 나왔지만요.
재즈 선율에 맞추어 길거리 소음이 뒤섞입니다. 그 위에 얹히는 사람들의 말소리……. 테라스의 손님들은 일본어나 영어로 떠드는데, 나는 누구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그건 흡사 음악처럼 들립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 소리를 사랑합니다.
그때 마침 두 명의 남자가 가까운 테라스에 앉습니다.
익숙한 말소리가 들려오자 내 귀는 저절로 의미를 찾아 헤맵니다.
한국말로 대화가 오가자 평화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아.”라고 건너편 남자는 말합니다.
대체 뭐가 쉽지 않다는 걸까요? 나는 놓친 문맥을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사정을 알기도 전에 그들은 나보다 먼저 카페를 나섭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는 다시 의미를 잃었습니다.
나는 지금 저 끝의 가로수나 그 아래 자물쇠 달린 자전거, 바람에 나부끼는 스테이크집 깃발처럼 조용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합니다. 거의 텅 비어있어서 사물에 가까워집니다. 그것은 한 폭의 풍경으로 남는 일에 기꺼이 합류합니다.
스키니진을 입은 여자 머리에 얹힌 선글라스처럼.
밤이 되길 기다리는 별 같은 네온사인의 전구처럼.
낮게 구름 깔린 나하 시(市)의 흐린 하늘처럼.
아마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일어났어도 나는 눈치채지도 못했을 겁니다.
나쁜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저기 세워진 자전거에게는.
30km 속도 제한을 알리는 표지판에게는.
‘BLUE SEAL’ 스티커가 붙은 노트북에게는.
한낮 대로변에 홀로 불 켜진 네온 사인에게는.
나쁜 일이란 무엇일까요?
아……. 하늘이 흐리더니 비가 내리네요.
테라스에서 보는 스콜성 소나기는 아름다워요.
우산을 든 사람보다 비를 맞는 사람이 더 많고,
앞머리를 젖은 소녀들이 미소를 머금고 재잘거리며 지나갑니다.
행인들이 걸음을 서두르지 않기에 그 동작이 아름답고,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뛰기 시작한다면 난 미소보다 더 크게 웃을 테죠.
삶은 좋습니다.
악기를 다룰 수 안다면 음악으로 표현했을 테고,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면 그림 그렸을 테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그저 활자를 낙엽처럼 엮였습니다.
오키나와 해변의 조개를 엮은 목걸이처럼,
글자를 음표처럼 엮어 아름다운 악보를 완성합니다.
여기 그 악보가 있습니다.
영수증 뒷면에 적힌 악보는 이 테라스를 떠나는 순간 빗물에 젖어 잉크가 번져버릴 테지요. 순간순간은 물에 젖은 잉크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고, 여기 앉았던 사람도 사라집니다.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