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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Sep 26. 2024

사자

1~3. 사자의 등장

1.

일요일 아침, 연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박은 시금치오믈렛을 만들고 최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박은 오믈렛을 뒤적거리다가 연에게 잘 잤느냐고 물었다. 연은 가까이에 있는 최를 먼저 끌어안은 후에 몇 걸음 더 걸어가 박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박은 뒤집개를 프라이팬 위에 올려두고 뒤돌아 연을 껴안았다. 연은 잠시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박은 다시 뒤돌아 시금치오믈렛을 뒤적였다.


연은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빵 먹을 사람?”

“난 됐어.”


최는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오믈렛을 만들던 박이 연에게 물었다.


“오믈렛 안 먹고?”

“빵도 먹고 싶어서. 안 먹을 거지?”


연은 냉장고에서 바게트를 한 조각 꺼내 토스터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냉장고에서 오렌지마멀레이드와 버터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셋이 조금씩 몫을 다하니 제법 그럴듯한 아침 식탁이 되었다. 연이 직사각형 식탁에 먼저 자리를 잡자좌우에 박과 최가 앉았다.


“오늘은 다들 안 나가지?”


최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박이 대답했다.


“어, 별일 없어.”

“그럼 점심은 나가서 먹을까? 이 앞에 새로 생긴 쌀국수집 맛있다던데.”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게트에 오렌지마멀레이드와 버터를 듬뿍 발랐다. 셋은 주말이면 이 시각에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는다.


연은 바게트를 입안 가득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박과 최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둘이 꽤 닮았다. 가르마를 탄 방향, 집에서는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거의 파자마를 입고, 서로를 배려하는 말투, 식사 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몫을 하려는 성실함, 약간 지적인 느낌까지.


둘이 이렇게 닮았던가.


박과 최가 연의 연인이 되어 이 집에서 산 지 1년. 박은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만났고, 최는 전 직장 거래처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불편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자연이 늘 그렇듯 생명체는 공존하는 법을 알아낸다. 암묵의 규칙이 쌓이자 이 집에도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예를 들면 데이트 약속을 잡으면 사전에 공지한다, 키스 이상의 터치는 방에서만 할 수 있다, 한 사람과 사흘 연속으로 섹스하지 않는다, 연의 방에는 물건을 두지 않는다, 일요일은 되도록 모두와 함께 보낸다 등. 그래서 일요일 낮에는 섹스도 금지라는 것도.


연은 눈동자를 왔다 갔다 굴리며 둘을 보았다. 박이 연에게 물었다.


“왜 그런 식으로 봐?”


최가 커피를 마시려다가 물었다.


“왜? 뭘 어떻게 봤는데?”

“이렇게, 눈동자만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를 봤어.”


연은 씩 웃었다.


“들켰어? 둘이 좀 닮은 것 같아서.”

“그런가? 별로 안 닮은 것 같은데.”


박과 최는 서로를 마주 봤다. 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최가 내려준 커피는 시큼하고 달콤하고 쌉쌀한 맛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박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최에게 말했다.


“오늘 커피 좋은데?”

“어, 최근 내린 것 중에 제일 좋아.”


최는 웃으며 연을 쳐다봤다. 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가 내려준 커피는 분명 세 가지 맛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연은 오늘따라 이 커피 맛이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2.

“하우스 메이트로 들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박과 최는 저녁을 먹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요일 오후 7시. 연은 며칠 전부터 박과 최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배달시킨 청어알마라파스타, 씨푸드피자, 샐러드가 식탁에 있었지만 박과 최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연은 포크를 내려놓고 박과 최의 손을 잡았다.


“자기들이 싫어진 게 아니야. 그냥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저 방도 비어 있었잖아.”


연은 거실 옆에 붙어 있는 방을 가리켰다. 박과 최가 들어오기 전, 연에게는 이미 동거 중인 연인이 있었다. 박과 최가 들어온 후 이 집에서 나갔지만 말이다. 잠시 후, 박이 연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너랑 헤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최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냅킨으로 입을 닦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직접 봐. 직접 보는 게 빠를 거야.”


박이 물었다.


언제 들어오겠대? 그쪽도 다 아는 거야? 이렇게 사는 거?”

“어, 내가 다 얘기했어. 자기들이 허락하면 다다음 주 토요일쯤 온다고 했는데 날짜는 다시 얘기해서 알려줄게. 저 방에서 지낼 거고, 청소는 내가 할 테니까 자기들은 신경 쓸 거 없어.”


박과 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음식에 손을 뻗지는 않았다. 연이 말했다.


“미안해. 이해해 줘서 고맙고.”


최는 와인잔을 비웠다. 그리고 결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박은 최의 말을 들으며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3.

그 주 일요일 10시. 박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주방으로 나왔다. 아무리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겨도 이마에 머리카락이 한 올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주방에서는 연이 야채를 손질하고 있었다. 박은 뒤에서 연을 안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10시 넘어야 일어나잖아.”

“그게…….”


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연은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박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연의 손이 닿자 박을 괴롭히던 간지러움이 사라졌다. 연은 어색함을 숨기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어젯밤에 들어왔어.”


박은 한동안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들어왔다는 거지? 박은 뒤돌아 그간 비어 있던 방을 보았다. 하지만 그쪽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저 방에? 아무도 없는데?”


연은 목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아니. 내 방에…….”


박은 고개를 돌려 연의 방문을 쳐다봤다. 연은 어디에 가든 문을 활짝 열어놓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오늘, 연의 방문은 꼭 닫혀 있었다.


“새벽에 갑자기 오겠다고 해서. 아무튼 오늘이 첫날이니까 내가 아침 만들려고.”


박과 눈이 마주치자 연은 다시 어색하고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연은 다시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방울토마토, 오렌지, 양배추, 루콜라, 과일치즈, 식빵……. 연은 샐러드 아니면 샌드위치를 준비하는 듯했다.


박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연을 도와야 하나? 커피를 내릴까? 아니, 그보다 거울을 봐야 할 것 같다. 박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천천히 하고 있어. 금방 와서 도와줄게.”

“아냐. 나 혼자 할 수 있어.”

“굿모닝.”


최가 파자마 차림으로 주방에 나타났다. 박은 화장실로 걸어가다가 손가락으로 연의 방을 가리켰다. 최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방과 박을 번갈아 봤다.


“들어왔다고. 오늘 새벽에.”


최는 다시 연의 방문을 보고는 박을 쳐다봤다.


“있다고? 지금?”


연은 수돗물을 끄고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아침은 내가 만들게. 그러니까 그냥 앉아 있어.”


박은 욕실로 들어가고 최는 쭈뼛주뼛 식탁에 다가와 앉았다. 연은 과일과 치즈를 잔뜩 넣은 샐러드볼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최는 연이 만든 샐러드를 내려다보았다. 연이 일요일에 일찍 일어나 요리를 하다니, 이런 일은 입주 후 처음이다.


연은 냉장고 문을 열고 안에 또 무엇이 있는지 살폈다. 최는 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자마 차림에 세수도 안 한 얼굴. 이 상태로 새 하우스 메이트를 맞을 수는 없었다. 최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려 했다. 그 순간, 연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큰 키, 긴 목, 얼굴을 찌푸리는 바람에 미세하게 잡힌 미간의 주름, 홑꺼풀의 커다란 눈, 높게 솟은 콧날, 헝클어진 검은 곱슬머리.


최는 이 사람을 보자마자 마치 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사자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더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천입니다.”

“아, 네. 최입니다.”


마침 욕실에서 박이 나왔다. 박은 선크림을 얇게 발랐는지 안색이 한층 맑아졌다. 박은 천에게 먼저 인사했다.


“박입니다. 반가워요.”

“네, 저도.”


연은 토스터에 빵을 넣으며 말했다.


“다들 와서 앉아. 빵만 구우면 끝나.”

“커피 없는데? 커피는 내가 내릴게.”


최는 찬장에서 원두를 꺼내려고 연의 옆에 섰다. 박도 포크와 접시를 꺼내려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주방에서 지난 1년간 보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잘 잤어?”


천은 연의 허리를 안더니 연의 얼굴을 돌려 입을 맞추려 했다. 박과 최의 눈이 마주쳤고, 연은 천을 떼어내려 했다.


“공용 공간에서는…….”


하지만 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둘의 입술이 닿았다. 천은 양손으로 연의 등을 감쌌다가, 목을 쓰다듬었다가,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고는 가슴을 쓸었다. 최는 왼손으로 미간을 긁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박은 욕실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연와 천의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평화롭게 지내던 이 집에 다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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