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 대한 기억
유난히 얼굴이 동그랗고 하얬다. 비쩍 마른 몸에 딱 맞는 교복이 작은 것도 같았지만 늘 단정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아주 오래 전인데 그 아이의 이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J. 첫 시험에서 그 아이가 전교 1등을 했다. 반에서 1등이고 전교에서도 1등. 우리 학년은 13개 반이 있었고, 나는 전교 10등 안에 들었지만 반에서 1등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J는 전교 1등을 놓칠 때는 있었지만 반에서 1등 자리는 지켰다. J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늘 앞쪽에 앉았고, 나는 키가 큰 편이라 뒤쪽에 앉아서 J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내 자리가 뒤쪽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는 J의 뒷모습을 언제든 볼 수 있었다. 전교 1등의 후광효과였는지 J를 둘러싼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하얀 얼굴도, 비쩍 마른 몸도, 때로 무심한 듯 멍한 표정도 뭔가 있어 보였다.
그때는 노골적으로 공부 잘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담임은 우리 반에 전교 10등 안에 드는 학생이 2명이라 좋아했지만 나는 꼭 1등을 해보고 싶었다. 누구도 꼭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종종 교실의 공기는 성적에 대한 중압감으로 채워졌다.
J를 이기고 싶었다. J를 이기고 1등이 되면 나도 J처럼 얼굴이 하얗고 비쩍 말랐지만 어딘지 분위기가 있는 아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를 할 때는 항상 J를 생각했다. 살면서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를 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중2가 끝나기 전에 나는 전교 1등은 하지 못했지만 반에서 1등을 했다. J를 이겨서 좋았지만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J는 여전히 동그랗고 하얀 얼굴로 무표정한 듯 멍한 표정으로 특유의 아우라 안에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기쁘지 않았던 이유가 J가 가진 아우라의 동력이 그 아이의 1등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즈음부터 J의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의 중2는 끝났고 J와 나는 다른 반이 되었다.
3학년이 되고 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모아서 과학고 대비반을 운영했다. 당시 부산에는 외고가 있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내 적성에 대한 고민도 없이 과학고 대비반에 들어갔고, 공부를 정말 잘하는 아이들 틈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 무리에 J는 없었다. 우리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는데 과학고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다들 공부에 지쳐있었고, 무언가를 향해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무엇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고 1등을 향해 내달리던 마음은 어느새 풀이 죽어버렸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서 학교에서는 과학고 준비하는 아이들은 수업을 듣지 않고 도서관에서 자습을 할 수 있게 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었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책에 코를 박고 공부를 할 때 나는 엎드려 자거나 도서관에 있는 책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책을 보며 가끔 J를 생각했다. J는 왜 여기에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생각이 흐르고 흘러 왜 그토록 J를 이기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어쩌면 나는 그 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까지 다다랐다.
나는 과학고 시험을 봤지만 당연히 떨어졌다. 시험장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면 이 시절을 끝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로는 언제나 경쟁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길은 피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마음, 그 마음 때문에 놓칠 수 있는 게 더 클 거란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때 J는 아마도 나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J에게 나는 어떤 아이였을지 (그러고보니 나의 영어 이니셜도 J이다), 지금의 J는 나를 기억할지 궁금하다. 라이벌. 어쩌면 그때 나는 J의 라이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라이벌이라는 그물 안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 그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