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필수적인 것인가?
고3이 되자 학교에서 자신의 장래 희망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다들 바쁘게 꿈을 조사하고 발표할 내용을 찾기 바빴다. 대학 가는데 중요한 생활기록부에 적히는 직업이었기에 고민하며 꿈을 찾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나에게는 10년 가까이 꿈꾼 직업이 있었다. ‘영화감독’. 초등학교 1학년 때 영화에 매료된 이후로 영화감독의 꿈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꿈을 유지해왔다. 난 이 꿈이 영원할 줄 알았다.
친구들은 ‘광고기획자’,’ ‘정치인’, ‘기업인’과 비슷한 직업을 발표했다. 어느새 내 차례가 가까이 왔다. 어떻게 나의 생각과 꿈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했다. 집 앞에 중랑천을 산책하며 영화감독을 꿈꾸게 된 계기부터 그 과정을 생각했다. 몇 달 전에 다녀온 캄보디아 여행 생각도 많이 났다. 몇 주를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발표 당일 날,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꿈이 없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럴만했다. 입학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만을 바라보면서 한 길만 팠으니깐. 그런데 고3이라는 이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꿈을 접는다고 하니 친구들이 놀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선생님은 표정은 어두워지셨다. 언짢아하시는 표정으로 나의 발표를 들으셨고 친구들은 선생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고 발표를 마쳤다. 선생님께서는 발표에 대해 “지금 꿈을 이루기 힘든 시기여서 그렇게 생각한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아니었다. 이 발표를 기점으로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꿈이 없다.
꿈을 꼭 가져야 하나?
꿈에 대해 생각한 첫 번째 질문이었다. 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봤다. 없었다. 난 꿈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학교나 사회에서 꿈과 진로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관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 이유로 많은 친구들은 1학년, 2학년, 3학년 희망 진로 칸에 같은 직업을 넣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니 꿈은 나에게 족쇄였다.
난 8살부터 영화를 즐겨봤고 좋아했다. 이는 꿈과 전혀 무관했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영화를 본 것이 아니었고,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서울역을 뛰어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냥 영화가 좋았고 카메라에 담긴 세상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10년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꿈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과 함께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붙여졌다. 난 이 타이틀 때문에 영화를 봐야 했고 영화과에 진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생겨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열정을 만들어내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꿈이 없어도 영화를 봤을 것이고 영화과에 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했으니깐. 열정이 넘쳤으니깐. 이미 넘치고 있는 열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꿈이라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영화감독의 타이틀에 집착하였다. 어차피 꿈이 있든 없든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모든 길을 막아버리는 꿈
올해 2월에 캄보디아를 다녀왔을 때 이야기다. 원래는 봉사를 목적으로 간 교내 여행이었다. 하지만 난 봉사에 큰 관심도 없었다. 물론 캄보디아라는 나라에도. 그냥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즐기자는 생각에 떠난 여행이었다. 모든 곳을 비우고 간 그곳에서 많은 것을 채워 올 수 있었다. 캄보디아의 풍경, 아이들, 일몰,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막 피어난 사랑. 수많은 감정과 추억이 나를 채웠다. 귀국 이후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하다 여행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2주 동안 타지의 기억을 되살려 글을 적은 결과 150 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모아놓은 용돈을 들여 50부를 제본해 같이 다녀온 분들과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이 경험은 인생에서 잊히지 않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만약 내가 캄보디아에 봉사를 목표로 갔다면, 많은 친구들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갔다면, 가서 책을 적어와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갔다면, 나는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곳에서의 여행을 즐기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그때의 나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책을 쓸 수 있던 것이다. 가끔 목표는 오히려 삶을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 또 가끔은 삶을 즐기는 것이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온다.
며칠 전에 본 동기부여 영상에서 인상 깊은 문장을 봤다.
“진정한 사냥꾼의 목표는 식량이 아니다. 사냥,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꿈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목표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삶의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