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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시작이 힘든 그대에게

책상에 앉게 되는 이유를 찾아서...

1992년, 한 여고에 입학 배정을 받은 후, 반 배치 고사를 치뤘다. 학교는 1등부터 48등을 9반에 배치하고, 다른 반이 안보이는 엉뚱한 곳에 1-9 표찰을 달았다. 9반 아이들은 입학도 하기 전에 소집되어 성문종합 영어와 정석 실력으로 수업을 했다. 고2부터는 문이과로 나뉘면서 별도의 교육과정 운영이 어려워서인지 교실 반 칸 정도 되는 공간에 독서실 책상 20여개를 채워 정독반을 만들었다. 반에서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을 선발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그곳에서 공부하게 했다. 당시는 학교교육 공정성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기에 이런 식의 학교 운영이 보편적이었다. 덕분에 3년간 같은 반이었지만 2학년부터 정독반에 못들어간 친구의 견제를 늘 받아야했다.


1-9반 교실은 조용하고 외진 곳에 있기도 했고, 공부하는 아이들이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싶으셨는지 야간 자율학습 감독 선생님의 발길이 잘 닿지 앉았다. 9반의 면학 분위기는 좋았지만, 노는 것도 열심이었다. 국회의원 보좌관 하면 딱 일것 같은 반장이 자율학습을 다 째고, 영화를 보러가자는 제안을 했다. 저녁 먹으러 나가서 10시 전에 오면 된다는 것이다. 교실에 불을 다 켜고 커튼을 쳐서 건너편 건물에 있는 교무실에서는 알아채지 못하도록 완전 범죄를 실행했다. 하지만 평소 안치던 커튼을 치는 바람에 우리의 귀여운 일탈은 꼬리가 잡혔고, 반장만 대표로 혼났는지, 다같이 손바닥을 맞았는지 기억엔 없지만, 컴컴한 극장에서 맘 졸이며 영화를 보던 짜릿한 추억을 만들어준 반장이 고마울 뿐이다.


2학년부터 들어간 정독반은 말 그대로 정독만 했기에 추억의 사건은 없었다. 나는 공부에 사력을 다하기 보다는 학교 공부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적절하게 섞어서 하는 겉으로만 모범생이었다(찐 범생들은 보좌관급 리더십에도 영화보러 안 갔다). 국어 참고서 밑에 영화 잡지가 자주 있었고, 수학 깜지 한 장 하고 나서 예쁜 노트에 책에서 읽은 좋은 구절을 필사하는 보상을 스스로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비디오 대여점 브로셔에서 보고싶은 영화를 잘라서 스크랩 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수험생이 이러면 안되지 싶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성경의 잠언도 꽤나 읽었던 것 같다. 당시 30대 미혼의 실력파 한국지리 선생님이 정독반에서 고시 준비를 하셨다.


매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나는 정독실 타이틀에 맞게 그곳에서 다양한 것들을 정독했다. 칸막이가 쳐진 자그마한 책상에서 교과서, 잡지, 문제집, 다이어리, 책, 성경, 노트, 편지지가 순번에 따라 펼쳐지고 규범과 일탈을 오가면서 나만의 작은 세계가 펼쳐진다. 왼편에는 방금 뽑아낸 달달한 자판기 커피가 있다. 오른손에는 적절한 마찰력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볼펜이 내 삶의 빈 공간을 깨알같은 글씨와 밑줄들로 메워가고 있다. 뭔가 충만함이 느껴진다. 게다가 내 등 뒤에는 학구파 선생님이 퇴근도 마다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시다. 알수 없는 벅차오름이 있다. 공부에 성과가 없거나 성적이 떨어져도 그닥 괘념치 않고 그 충만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된다.

글쓰다가 잠든 딸의 방에 살짝 들어가 책상 사진을 찍어봤다. 신카이 마코토의 스즈메의 문단속 1편이 반겨준다. 책이 놓인 위치를 보니 하루의 마무리를 이 책으로 했구나. 너도 이곳에서 숙제와 애니,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오가며 충만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기쁘다.


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결과가 나오는데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오래해야 실력이 쌓인다. 과외 몇 달했다고 성적 오를 수 있지만, 그게 진짜 실력은 아니다. 뭔가 오래 하려면 그것과 동반된 감정과 느낌이 좋아야 한다. 너무 통제하면 답답함을, 너무 자유로우면 불안함이 생긴다. 규범과 자율의 균형이 적절할 때, 그리고 그 규범을 같이 지켜내는 공동체가 있을 때, 그리고 그 공동체에 좋은 모델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안정감 있게 지속할 수 있다.


아이가 집에서 공부할 때 가족이 함께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보자. 아이가 집에서 공부하는 최소한의 시간을 정하고 ‘러닝센터’, ‘가정학습’ 이라는 이름을 정해보자. 그 시간과 공간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말자.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나도 좀 기다리자. 최근 다시 유행하는 슬램덩크 만화도 좋으니 그 시간엔 모든 가족이 책상에서 책을 펼쳐들자. 아이가 공부 때문에 나만 고생한다는 부정적 감정이 들지 않게 하자. 공부 덕분에 우리 가족이 한 공동체라는 좋은 기분을 들게 하자. 입시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배움의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들어가자. 그곳에서 공부는 외로운 싸움에 견뎌야 할 고통이 아니라 도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면서 같이 성장하는 과정임을 느낄 수 있다.


한국지리 선생님의 이름과 학교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몇 년 전 학교 홈페이지에 수행평가 양식을 올리셨으니 선생님의 30년 전 도전은 실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료는 수업설계를 가르치는 내가 봐도 훌륭했으니 선생님은 정년을 앞두셨지만 여전히 실력있으시다. 그리고 반장, 넌 어디서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너의 간 큰(?) 행동과 대범한 일탈에 내가 참여했던 덕분에 삶에서 도전하는 즐거움을 알 수 있었지. 고마운 이 두 사람이 그 옛날 지루했을 법한 야간 자율학습을 약간의 긴장과 충만의 시간으로 만들어주었고, 대학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캐나다 거위는 무리지어 날면 혼자 날 때보다 40배 더 오래 날 수 있다.  / Image source: Pinterest


캐나다 거위는 혼자서 한 번에 60마일을 날 수 있지만, 리더를 앞세워 V자 대형으로 날면 한번에 2500마일을 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제자들에게 이 두가지를 알려주고 싶다. 1) 배우는 것을 격려하는 공동체에 들어갈 것, 없으면 만들 것, 거기에 좋은 모델이 있으면 더 좋단다. 2) 공부할 때 나에게 좋은 기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민할 것. 이 두가지만 있다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다른 일을 하다가 책상앞에 앉기 전 장시간 고민의 터널을 지나지 않아도 된다. 공부는 Social 해야 한다. 그리고 공부는 Emotional 해야 한다. 그래야 계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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