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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내 Feb 05. 2024

덕분에 쓸 만해진 나, 날들

시내의 말;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어

교육자이자 수필가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No mad, No reach(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어릴 적부터 뵐 때마다 들려주셨던 말이거니와 명절마다 받는 용돈 봉투에도 어김없이 써주실 만큼 중요하게 전해주신 문장이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장이 자연스레 삶으로 녹아들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 보고 듣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지!)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미쳐 있었고, 그런 나를 열렬히 매료하여 힘껏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들은 답도 없이 헤매고 흔들리던 순간마다 기적처럼 손 내밀어 내가 지금에 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정말이지 부지부식 간에 그 문장처럼 살아왔던 거다.

 

나는 이처럼 늘 무언가를 사랑하느라 바쁜 나를 참 많이 좋아했다. 내게 사랑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으므로 다시 태어나도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행복하고 애틋했다. 무언가를 사랑하지 못해서, 좋아하는 것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이들을 보고 나서야 사랑할 줄 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아 마음속 깊이 감사했다. 


나처럼 행복한 이가 더 많아지길, 같은 행복을 맛보고 더 즐거운 일상을 영위하길 바라 직업을 정하고 커리어를 쌓았다. 어려움도 있었으나 다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다 괜찮았다. 그러나 너무 행복했던 거다. 보고도 지나쳐버린 경고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일상의 행복은 위기를 겪으며 산산조각 나버렸고, 그간의 수많은 시간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다는 듯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일상은 크게 두 번의 고난을 겪었다. 간략히 '꿈을 잃어버렸을 때'와 '나를 잃어버렸을 때'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 번째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전부나 다름없었던 꿈을 잃고 사정없이 휘청이던 나를 지탱해 준 이들 중 하나인 친구 A는 게워낼 분노와 슬픔이 다 마를 때까지 온갖 이야기를 토해내던 내게 가만히 귀 기울여주다 나지막이 말했다.


"나한테 들려준 그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보는 게 어때? 나도, 다른 사람들도 읽어볼 수 있게."


고난은 사람의 자존감을 아주 박살 내놓기 마련이다. 그때의 나도 어림없이 조각난 상태였는데 그때 들려온 A의 말은 머리를 아주 멍하게 만드는 말임과 동시에 커다란 위로가 되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엔 기자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늘 타인의 삶을 잘 들여다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듣고, 글로 적느라 여념 없었는데 누군가 역으로 나의 삶을 들여다봐주고, 궁금해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 없는 생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책이 될 수 있나?'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동시에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기자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바로 실행에 옮기진 못 했고 몇 년이 흐른 후, 두 번째 고난인 '대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적어도 나만큼은 괜찮을 줄 알았던 스물아홉. 소문만 무성했던 악명 높은 아홉수의 위력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는지 그놈의 아홉수를 아주 지독하고도 처절하게 앓은 후에야 가까스로 서른에 안착했다.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살고 싶어서 병원을 찾아야 했을 만큼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밤새워 일하길 반복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엉망이 된 채 찾아간 병원에선 "이대로 가다 간 더는 글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란 말을 들었다. 문화부 기자에서 공연 기획자, PR 전문가가 되기까지의 지난 7년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성인이 되고, 20대를 뜨겁게 보내는 동안 종종 상상해 봤던 나의 서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원하는 커리어를 쌓는 것은 물론 그때 그 시절 드라마 속 ‘김삼순’처럼 당차고, 봄날의 ‘달자’처럼 사랑스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상상 속 선택지에도 없던 모습으로 이렇게 세상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을 줄이야. 서른이 되던 생일날, 태어나 처음으로 위스키를 마셨고 천장만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결국 몸을 일으켜 펑펑 울고 말았다. 남들은 제법 성숙한 모습으로 어른의 삶을 살기 위해 저만치 나아가는데 나 혼자 여기 머물러 비틀거리는 기분. 나의 서른은, 그저 서투른 어른의 줄임말에 불과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의사의 권고대로 일을 그만두는 건 괜찮았지만 글을 쓰지 못하게 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가슴 한편엔 작가라는 꿈이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냅다 쓰기 시작했다. 뭘 써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잊고 있던 A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 덕분이다. 


"나한테 들려준 그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보는 게 어때? 나도, 다른 사람들도 읽어볼 수 있게."


컴퓨터 앞에 앉아 책상을 정리하듯 우울을 치워버리고 행복을 되찾기 위해 지난날, 내가 열렬히 사랑했으나 잊어버린 모든 것들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나를 '나'로 이끌어 준 수많은 아름다움과 기적 같은 순간들을 찬찬히 되짚으며 하나씩 써내려갔다. 언제가 되더라도 다시는 잊지 않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말이다. 


생각해 보면 소문난 '덕후'이자 유명한 '성덕'이었던 내게 참 많은 이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사랑하며 살 수 있어?" "나도 너처럼 재미있게 살고 싶어" 등등. 바쁘게 사느라 답변은커녕 나조차도 그런 나를 잊고 살았다. 다시 태어나도 나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행복했던 나는 어쩌다 나를 잃어버렸을까. 떠올리고 돌아볼수록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모를 신께 감사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순간들이 거기 있었다.


아득하게 주어진 시간 위에서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잘한 것도 없는 나를 위해 빛나준 수많은 우연들. 때론 독이 되기도, 욕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존재들. 매 순간 열렬히 매료되어 힘껏 사랑했던 그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쓸 만해진 나와 날들이었다. 향 중 향은 '취향'이요, 삶에 감칠맛을 더하는 건 '취미'가 아니던가. 누군가 물어오던 질문들에 하나씩 답변하는 마음으로 내 삶에 향과 맛을 더해주고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준, 돌아보니 운명이었던 우연의 기록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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