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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내 Feb 06. 2024

운수 좋은 날 (1)

프롤로그


'Alt+S'


  글을 오래 쓰다 보면 머리보다도 왼쪽 손가락 근육에 새겨지는 단축키(한글 프로그램 기준, Ctrl+S를 쓰기도 함)이다. 작성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자동 저장' 기능에만 의존하면 한 번쯤 머리 싸매가며 쓴 글 전부 허공에 날리고 생전 피워본 적도 없는 담배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기 마련이니, 수시로 단축키를 눌러 저장하는 행위를 습관이나 버릇이라기보다도 숨 쉬듯 당연하 게 되어버리는 거다. 


한 문장 건너 누르고, 글이 막힐 때도 누르고,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그저 바라보다가도, 누가 부르거나 전화를 받기 전에도 자동으로 눌렀다. 글 깨나 써왔던 내게 역시 이 단축키를 누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 그런데 삶이라는 건 참 얄궂지. 단축키가 손에 익도록 썼다 지운 단어가 몇 갠데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삭제될 수 있었을까? 놀라운 건 사라진 게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거다. 애초에 입력된 적도 없다는 듯 말하고, 읽고, 쓰며 쌓아온 단어들마저 하나둘 희미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언젠가 꼭 글로 먹고살겠다는 작가로서의 열망이 싹터버린 후였다. 다시 돌이켜 봐도 아찔하고 끔찍하지만 나는 이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이 이야기를 읽고 있을 여러분도 없었을 테니까. 


불행은 기적이 그러하듯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걸 알면서도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던 날이다. 삶이라는 게 감히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변수투성이라 갖은 대비에도 맞을 파도는 맞을 수밖에 없다지만 악명 높은 '아홉수'의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더 강력한 것이었다. 


  홍보 전문 회사에 다니던 때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무실에 앉아 문서를 작성 중이었고, 기한은 언제나처럼 'ASAP'이었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결과물을 상부에 전달해야 했다. 업무 특성상 프로젝트를 하나만 맡는 직원은 없지만, 며칠씩이나 새벽 야근을 반복한 데다가 그날따라 유독 오전부터 일이 정신없이 밀려와 점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키보드에 올려둔 손이 차가워지더니 오한이 찾아왔다. 


낯선 증상은 아니었다. 계속 앉아만 있느라 종종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손발이 급격히 차가워지곤 했으므로 서랍에 쟁여둔 핫팻 몇 개를 꺼내 옷 안에 넣고 손등 위에 올렸다. 그러고 나면 천천히 괜찮아지다 아무 일 없이 업무를 이어나갈 수 있어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어느 순간이 되자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졌고, 분명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정신이 어딘가로 멀리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느낌이었달까. 이상함을 깨닫고 나자 현기증이 일어 모니터에 고정해 둔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사방에 있던 벽이 빠르게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나가서 쉬다 들어오면 괜찮아질 거라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키려다 멈칫, 쓰던 글을 저장하기 위해 힘겹게 왼손을 움직였지만 쉽지 않았다. 작은 핫팩이 무거운 모래주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눈앞이 흐려지는 듯한데 '날아가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해.'라는 생각에 그대로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다시는 쓸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주고 애를 써도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갈 곳 잃은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찔거리는 동안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숨 쉬듯 눌러왔던 단축키를 찾지 못 했다. 오른손으로 마우스 저장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방법은 떠올리지도 못한 채 결국 글을 저장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숨이 막혔다. 높은 곳, 벽이 없어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높은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구석진 벤치에 앉기가 무섭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머리를 감싼 채 한참을 울다 그간 겪었던 이상한 점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문장을 매끄럽게 만들기가 어려워 대화가 불편하고 이름이나 장소, 특정 기억들이 잘 떠오르지 않아 말을 자주 더듬었다. 글을 쓰면서는 생각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 데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사전을 펼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자신이 못내 불안하고 답답해 밤잠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나는 아픈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못 견디게 서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냥 이대로 하늘이 무너져버렸으면. 세상도, 나도 다 사라져 버렸으면. 잘 살고 싶었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이고 뭐고 그 옥상에서 온몸을 쥐어짜듯 얼마를 울었을까. 실컷 울고 나니 눈물이 차올라 잠겨 죽을 것 같던 세상에 겨우 숨 쉴 정도의 바람이 들었다.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것을 들이쉬었다 내쉬길 반복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있었던, 도망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꽤 많이 아픈 것 같았다. 그것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더 망설일 것 없이 휴대폰을 꺼내 가까운 정신과를 찾았고, 바로 진료를 예약했다. 지금의 나를 지켜줄 건 즐겨 듣던 노래 가사나 동경하던 소설 속 문장, 영웅처럼 떠받들던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니었다. 오직 나뿐이었다.  



(2)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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