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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내 Feb 14. 2024

끝과 시작의 바다 (2)

Part of your world

2.

  누구에게나 '첫 번째 친구'가 존재한다. 가만 돌이켜보면 내 기억 속 가장 첫 번째 순간에는 붉은 머리를 나부끼며 푸른 바다를 헤엄치던 그녀가 함께했다. 바닷속에서도 부드럽게 너울거리는 머리카락,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인어. 알 사람은 다 아는 디즈니의 그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1989)>다. 자라면서 '동경하다'라는 뜻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디오가 늘어지도록 보고 또 봤던 인어공주를 떠올렸다. 그녀의 존재를 수식할 자리에 알맞은 단어를 그제야 찾아낸 거다. 


  유독 소심하고 예민했던 아이는 지금과 다를 것 없이 상상하고 공상하며 노는 걸 가장 좋아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나보다. 물이 있다면 더 수월했는데, 어린 날의 나는 언제나 그녀와 함께 바닷속 세상을 여행하는 상상을 하며 물장구를 치고 헤엄쳤다. 어느 때부턴가 잠수를 오래 하기 시작한 것도, 물 안에서 눈 뜨는 걸 좋아하게 된 것도 전부 그녀와 함께 바다에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게 수월해지면 그땐 정말 같이 바다로 떠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인간이 되고 싶어 목소리도 내어놓는 그녀처럼 나 역시도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내어놓고서라도 인어가 되고 싶었다. 유치원에서 장래희망을 묻는 조사지에 '인어공주'를 써넣기까지 했으니 가장 친한 친구이자 꿈이기까지 했던 셈이다. 바다를 사랑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인공인 에리얼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을 편견 없이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그 세계로 건너가는 데 거침이 없다. 망설임도 없다. 바다마녀도 탐낼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던 'Part of your world'는 망설임과 두려움 많던 아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호기심 많은 열일곱 소녀의 노래는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보고 듣자 노래로 그치지 않았고, 브라운관을 빠져나와 삶 전체를 완전히 관통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나는 줄곧 내가 닿지 못한 세상과 보지 못한 세계를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욕심내고, 어떤 선과 벽을 계속해서 넘고자 했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색될 만도 했지만 그 마음은 자라는 동안 변함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 언제나 바다를 갈구하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곁을 맴돌며 남들이 뭐라 하던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용기이자 든든한 기반이 돼주었다.  


허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던 육지와 바다, 두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건 허무맹랑하다는 주변의 시선과 거듭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심에 충실했던 열일곱 소녀의 무모함과 순수함이었다. 왕자와의 사랑까지 쟁취했음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커보니 다른 세상을 들여다본다는 것, 다른 세상에 발 들인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와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모르지 않다. 무언가에 매료되고, 집중하고,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것.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든 조금의 진심도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회는 진심인 이들을 바보처럼 여기기도, 한심하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들었던 '누군가 바보라고 하는 그 바보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에 대한 증명이 일찍이 그 바다에 있었던 거다.  


3.

  이런 정도이니 가까운 사이라면 내가 인어공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덕분에 우연히 인어공주를 보고 날 떠올렸다며 연락을 보내오기도 하고, 이런저런 굿즈들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덕분에 내 방 곳곳엔 인어공주가 가득하다. 이런 딸을 둔 탓에 집 안에선 종종 재밌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하는데 거실에서 디즈니 프린세스 쿠션을 베고 에리얼이 그려진 담요를 덮고 TV를 보는 아빠의 모습을 볼 때면 살짝 죄송해지기도 한다. 딸 둔 아빠의 숙명은 키운 지 30년이 지나도 그런 건가 보다.


아무튼. 누군가 나의 취향을 간직했다가 떠올려주고, 떠올릴 수 있는 매개가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지만 어떤 누군가는 서른이 다 된 여즉 디즈니를 좋아하고, 인어공주를 끼고 사는 내가 조금 유치하고 이상하다 여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내 친구 B도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큰 영화관에서 '디즈니 특별전'을 열었을 때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동네 친구였던 B에게 연락해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워졌을 에리얼을 보러 가자고 졸랐다. B는 도대체 디즈니를 왜 그렇게 좋아하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동행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장성한 두 남녀가 팝콘에 콜라를 끌어안고 저녁 시간에 영화를 본다. 여자는 첫 장면, 첫 음악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울기 시작했고 남자는 당황한다. 가져온 티슈를 건네받은 여자는 계속해서 훌쩍인다. 기억 저편에 잠들어 있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같아 급격히 밀려오는 그리움과 반가움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낭만적일 수 있었던 영화 데이트 현장 같지만 나와 그는 온갖 사정을 전부 공유하는 절친한 친구일 뿐이었고, 함께 본 영화는 <인어공주>였을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 나는 여운 때문이었지만 어쩐지 B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지만 B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눈이 빛나는 것 같았다. 무슨 만화영화냐며 투덜대던 친구는 온 데 간데없고 오늘따라 밤하늘이 참 예쁘다며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감성 청년이 서있었다.


"네가 왜 그렇게 디즈니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세상이 조금은 순수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 느낌 나쁘지 않네."


무슨 말을 들은 건가 놀랐지만 그의 감상을 해치고 싶지 않아 그렇다니까, 하고 말았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슴 벅차게 기뻤다. '나도 그래,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나 사랑하는 거야.' 바로 그거였다. 풍성한 머리가 붉고 아름다워서, 피부가 하얘서, 목소리가 예뻐서가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닌 거다. 


나는 그걸, 그날에야 분명히 깨달았다. 세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때마다 첫 번째 친구를 찾았다. 테이프로 봤다면 수십 개는 늘어져 버렸어야 할 정도로 찾고 또 찾았다. 그녀는 매번 똑같이 노래하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첫걸음을 내딛곧 했지만 언제나 내가 세상에 짓눌려 가라앉지 않고 사랑할 수 있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었다. 알면 알수록 버겁기만 한 세상에서 알게 모르게 숨이 되고 쉼이 되어주었다. 니체가 말하던 동심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려나.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도 사랑하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그녀를, 바다를 사랑하게 된 이유였다.


  B가 이후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더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 기뻤다. 그리고 부디 그에게도 그런 첫 번째 친구가 있기를. 잊고 있었다면 떠올려 되찾았길, 만약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그런 친구가 생기길 진심으로 바랐다. 꿈이자 동경, 공상이자 자유. 영원히 거기에 머물며 영혼이 삭막해질 때마다 단비를 내려줄 첫 번째 친구. 나에게 에리얼이 그러하듯 말이다. 




  글을 정리하다 잠시간 집중이 흐트러지며 무질서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땐 청소를 하고 넘어가는 게 '국룰'이므로 별안간 책상 정리를 시작했고 이왕 시작한 거 서랍 깊숙한 곳까지 정리하려 전부 다 끄집어냈다. 그러다 서랍 맨 아래 깔려있던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날부터 쭉 갖고 다니던 여행 수첩이었다. 종종 혼자 떠나곤 했던 모든 여행의 순간이 거기 담겨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대로 바닥에 앉아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이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소름을 느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것의 시작은 여기서부터가 맞았다.


내 여행은 끝에서 시작한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이면 예열되는 엔진만큼이나 점점 뜨거워지는 가슴으로 <인어공주> OST인 'Happy Ending'을 재생하는 거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인 왕자와 인어공주의 결혼 장면에 삽입된 곡으로 제목 역시 ‘행복한 결말’이지만, 사실 인어공주에겐 모든 걸 내던질 정도로 갈망했던 사랑하는 이와 육지에서 맞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므로 나는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음악을 들으며 인어공주가 느꼈을 벅찬 마음과 설렘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나의 가장 오랜 친구, 너는 정말 언제나 함께였구나. 웃음이 났다. 바다는 쏟아지는 비에도 젖지 않고 몰아치는 폭풍우에도 휘둘리지 않으니까. 죽일 듯 화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그곳에서 나는 언제고 그녀와 헤엄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세상을 마음껏 사랑해야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도 많아. 긴 장마는 끝났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 딱 좋은 때다. 끝과 시작의 바다, 나는 그곳에서 오늘도 넘치게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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