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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소곤 Jan 16. 2023

너의 가능성, 나의 그릇

 어젯밤, 남편과 '우리 솔이가 지금 얼마나 예쁜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부쩍 자라고, 애교가 는 솔이는 요즘 정말 정말 예쁘다. 그리고 아마, 솔이의 가능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도 같다.


 유치원 2학기 초입, 7세는 2023년 1월에  한자시험 8급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정에서 많은 협조 부탁드린다는 공지와 함께. 나는 처음 그 공지사항을 전달받자마자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제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아이에게 한자가 웬 말인가, 게다가 한자라는 개념을 알기나 할까, 다른 친구들에게는 무리가 아닌 시험이겠지만, 어쩌면 우리 솔이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다. 괜히 한자 가르치겠다고 애랑 필요 없는 감정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두 달가량을 허송세월을 보냈다. 나는 당연히 솔이에게 무리일 거라고 생각해서 시도 조차 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한 번, 유치원에서 가져오는 빈시험지(아마 친구들은 풀고 솔이는 못 푼 모양이다)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니까.


 11월 초였나, 어느 날 솔이가 一을 쓰고, '한일'이라고 읽는다. 二를 쓰고 '두이'를 읽는다. 三을 쓰고 '석삼'이라고 읽는다.


 '어머 우리 솔이도 할 수 있나 봐'


 11월 15일, 인터넷에서 부랴부랴 8급 한자 벽보를 검색해 주문했다. 그리고 오며 가며 같이 읽었다. 그때도 설마, 우리 솔이가 지금처럼 잘해줄 거라고는 믿지 못했었다.


 

솔이가 푼 첫 시험지

 그리고 12월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매일 빈 시험지만 가져오던 솔이가 <38점> 짜리 시험지를 갖고 왔으니까. 그날 우리 집은 축제 그 자체였다. 38점도 너무 대단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하나도 모르던 한자를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익힐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10분씩, 솔이는 아빠와 한자 공부를 시작했다. 대부분 벽보에 있는 한자를 함께 읽거나, 기출문제를 열 문항씩 나눠 푸는 형식이었는데 솔이는 겨울 방학 내내 너무 잘해주었다.


 지난주, 개학하자마자 한자 시험을 봤는데 믿을 수 없는 점수를 받아왔다.

언빌리버블!!!!


 나는 환호했고, 정말 기뻤다. 솔이도 할 수 있는 아이였구나, 너의 가능성이 이 정도였구나.


 그리고 오늘, 한자시험 D-1. 그런데 내 기분은 먹구름이다. 솔이가 못해서가 아니다. 솔이는 지금까지처럼 꾸준히 잘해주고 있다. 문제는 이 정도로 솔이가 따라와 주니 내가 욕심이 생긴다는 것. 분명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한자 시험은 그저 경험을 쌓는 것이고, 합격하지 않아도 100%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아깝기 시작했다.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따라와 주었는데 근소한 차로 합격을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다. 저녁 내내 시무룩한 얼굴로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여보, 누가 보면 솔이 내일 수능 보는 줄 알겠어. 지금까지 너무 잘했고, 내일 합격 못 해도 아무 일도 아니야. 괜찮아."


 그렇지만 괜찮지 않은 나의 이 마음은 뭘까. 나의 그릇이 이렇게 작다니. 나의 불안함은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될 텐데, 겨우 이 정도의 부모라니. 과정을 즐기는 아이가 바로 솔이다. 솔이는 한자 시험을 준비하면서 싫은 내색이 한 번도 없었고, 한자 문제를 맞힐 때마다 우리가 환호해 주는 걸 즐기던 아이다.


 솔이의 가능성을 믿는다.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대단한 나의 아들.


 더불어 나의 작은 그릇을 책망한다. 겨우 이 정도 엄마였다니 한숨이 나온다.


 결과가 어찌 되든 우리는 두 달 동안 열심히 했고, 또 그 길이 즐겁고 의미 있었으니 행복한 과정이었다고 되새기고 싶다. 너의 가능성을 엿본 것,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뜻깊고 행복한 두 달이었다.


 (그렇지만) 내일 시험 잘 보면 좋겠어 아들아!! 엄마가 이 정도라서 미안해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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