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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니 강 Oct 18. 2018

10월, 다양한 색감의 하루

"카르파티아 산맥의 진주" - 트레치안스케 테플리체, 슬로바키아 

"카르파티아 산맥의 진주"라고도 불리는 트레치안스케 테플리체(Trecianske Teplice)는 브라티슬라바에서 약 1시간 반 정도 차로 이동하면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뻗어 나온 말라 파트라(Mala fatra) 산맥 주변 자락에 위치한 온천 마을이다. 보통 테플리체 (Teplice)라는 단어는 온천수가 유명한 마을 이름에 붙어 있다. 체코, 슬로박어로 테플로 (Teplo)라는 단어 자체가 "따뜻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파생된 게 아닌가 싶다. 

낮은 구릉 사이의 평야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헝가리의 귀족 가문 lleshazy에 의해 16세기 초부터 당시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겨졌던 온천 문화를 따라서 온천 마을로 변형되었다.  

*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시절(1867-1918), 헝가리 왕국에 속해있었다. 


다양한 미네랄 성분을 가지고 있는 여기 온천수는 관절염, 신경증에 좋아 치료 목적으로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오랜 기간 머물며 지내는 까닭에 자연 속에 위치한 실버타운 같은 느낌도 드는 동네이다. 산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가볍게 산보도 할 수 있는 오솔길과 온천이 잘 어우러진 귀여우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동시에 주는 신기한 동네. 





 유난히 날씨가 좋은 10월이다. 그 전날, 회사에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먹은 빅맥 햄버거 메뉴가 아직도 더부룩하게 남아있는 토요일 아침, 주섬주섬 보이는 대로 챙겨 입고 운전대를 잡았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며, 낮의 온도는 최고 20도를 넘나드는, 유럽의 가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평지에 일자로 뻗은 조금은 지루한 D1 고속도로를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작은 온천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온천이 목적 이기라기보다는 완연한 가을의 색을 즐기고 싶어 근교 산 동네를 찾다 보니 오게 되었다. 마을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근처 식당 주인아주머니께 어디로 산보를 가면 좋을지 물어보았더니 30-40분만 오르면 마을 경관이 보이는 언덕이 있단다. 딱히 힘겨운 등산은 할 생각은 없었으니 잘됐다 싶었다. 


마을의 정말 작은 중심지에는 몇몇 레스토랑, 펜션, 호텔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조그마한 동네에도 구 소련의 사회주의 건축물은 제일 중심가에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자리 잡고 있었다. 파란 하늘, 노랑,주황,초록의 알록달록한 산, 따뜻한 파스텔톤의 중세 양식의 건축물 사이, 갑자기 하얀색의 뜬금없는 평행사변형 형태의 거대한 스파 호텔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회색빛의 조형물을 둘러싼 회색 콘크리트 벤치는 한순간 블랙&화이트 필터를 씌운 효과를 준다. 이러한 잔재들을 볼 때면 현실을 벗어나 동화 속 마을에 들어와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와중에 레드썬! 하고 그만하고 현실로 돌아오라고 이마에 탁 치는 거 같다. 한참을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 호텔이 주는 이질감을 생각하다가 발걸음을 떼어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몇몇 무방비하게 방치된 낡은 샤토 같은 건물들이 있었다. 저 못생긴 스파 호텔은 떡하니 중심가에 있는데 고전미를 담은 건물들이 버려져 있는 걸 보니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아침도 먹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슬금슬금 배가 고파왔다. 패스트푸드 종류는 전혀 입에도 대기 싫어서 슬로바키아 전통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에 간단히 끼니를 때우러 들어갔다. 슬로바키아 전통 옷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20대 초반 인듯한 금발의 웨이터 리스가 맞이했다. 외국인인 나를 보더니 수줍어하는 느낌도 들었다. 참 순박한 사람들이다. 맞은편 테이블에 눈길이 간다. 할아버지, 중년의 부부 그리고 세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아들과 10대 딸을 둔 가족 테이블이다. 아무래도 주말에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온 듯하다. 술을 많이 마시는 슬로바키아 사람들답게 테이블에는 벌써부터 높은 도수의 술이 담긴 리쿼 잔들이 놓여있다. 10대 사춘기의 딸내미는 이런 모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폰만 들여다보고 있고 온통 어른들의 관심은 어린 아들에게 기울어져있다. 막둥이는 그러한 사랑 가득한 눈길들이 익숙한 듯 미소와 잘 먹는 모습으로 보답한다. 어딜 가나 막둥이와 첫째의 간극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맞은편 테이블의 가족 스토리를 혼자 상상하는 동안 주문한 갈릭 수프가 나왔다. 


언덕 중턱에 야외 사우나가 새로 생겼다길래 가보는 길에 마을 공원을 지나가다 햇볕이 따사로워서 벤치에 잠시 앉았다.  어린 남매가 킥보드를 타고 서로 술래잡기를 하며 주변을 빙빙 돌고 있지만 마냥 시끄럽지만은 않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고 슬로바키아 남자 친구에게 '우수수-'라는 의태어를 설명해주었는데 한국어는 참 귀엽단다. 뭐 하루 이틀인가? '그럼 당연하지!'라는 대답을 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배도 찼겠다, 가을 햇볕을 쬐고 있자니 잠시 잠이 스르륵 들었다. 최근 야외에서 잠든 것 중에서 제일 달콤했던 낮잠이었던 것 같다. 

야외 사우나는 정말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꼭 와인 저장고 같이 동그란 굴(cave) 모양으로 4 종류가 있었고 다들 사우나용 얇은 천으로 알몸을 살짝 가린 채, Hot&Cold의 극명한 차이를 즐기고 있었다. 오후 4시쯤의 공기는 정오와의 공기와는 다르게 조금 차가워졌다. 아직도 나체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사우나를 즐기는 것은 조금 익숙지 않다. 그래도 슬로바키아에서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달리 천으로 살짝살짝 가리기는 한다. 예전에 오스트리아의 한 야외 사우나를 갔었는데, 사우나 안에서 오스트리아 아저씨가 피니쉬(Finnish) 정통 사우나는 이렇게 하는 거라며 사우나 중간에 알몸으로 서서 수건을 휘휘 머리 위로 돌리는데, 그때 나는 그 수건을 돌림으로서 생기는 칼날같이 샤프한 뜨거운 공기 때문에 얼굴을 도저히 들 수 없었던 건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건지, 아마 후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그때보다는 조금은 덜 고개를 숙인 사우나를 두 어시간 즐기고 나니 벌써 오후 6시다. 




돌아오는 길은 조수석에 앉아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침부터 참 다양한 색감의 하루를 보냈구나' 라는 생각이 스친다. 쨍한 단색이 어우러진 풍경과 빛바랜 파스텔톤의 건물이 주는 안정감과 하얗고 네모난 건물의 생경함. 이제는 해 질 녘의 색감이 주는 뇌의 반응을 오롯이 느껴며 아무 말없이 브라티슬라바로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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