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헬로해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로해피 Apr 20. 2024

찰나의 기쁨을 걷다

찰나의 기쁨을 걷다


드디어 6시간 트래킹이 고된 고행 끝에 종료되었다. 조금만 더 걸었더라면 나의 발가락 군들은 고통을 절규하며 내 신발 안에서의 가출을 강행 했을지도 모른다. 철수와 나는 막걸리 두 병과 간단한 도시락을 배낭에 챙겨 넣고 아침 일찍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양수역에서 내렸다. 9월이지만 아직 지면에 남아있는 여름의 마지막 열기가 우리의 민낯을 반기고 있었다. 낯선 풍경이 전해주는 생경스러움과 설레 임도 잠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운 듯 그동안의 열정적 무대에서 그만 퇴장하려던 한 여름의 태양이 친절히도 마중 나와 우리의 고행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곳은 초가을과 늦여름이 혼재해 있었다. 두 계절이 서로 부둥켜 안고 어우려져 있어 잠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태양은 한 여름 못지않은 뜨거운 빛을 발산했고 냇가에는 아직 여름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으며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억새풀이 자라있었다. 또 들판에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는 계절의 찰나가 느껴지는 계절의 혼재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 순간, 이 계절의 간극사이에 우리가 여행길을 나서지 않았더라면 느낄 수 없는 감동들이었다.

우리가 이번에 도전한 코스는 양수역에서 시작하여 신원역을 거쳐 국수역까지 도착하는 구간이다. 물소리길 트래킹이라 하여 선택했던 코스인데 오랜 가뭄으로 코스 중간 중간에 있는 계곡이며 냇가에는 물이 다 말라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리 없는 물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말없는 과묵한 그와 생각이 많은 나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이번 도전은 우리 부부의 생애 첫 트래킹 도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정말 오랜만에 나서는 남편과의 여행길이었다. 그는 자연과 함께 하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여러 가지 악재와 사정으로 여행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트래킹을 하고 싶다는 나의 의견에 흥 쾌 히 동참해 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사람들은 왜 이런 고행을 자처하며 걷는 것일까? 걷는 모든 길이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정말 맘에 들어 오래도록 눈에 담아두고 싶고 쉬고 싶은 곳이 있는가 하면 괜히 이 길을 선택했다 할 정도로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길도 있다. 그래도 계속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길에서 독특한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특별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문득 나만의 길에서 나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경이로움마저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령 빨랫줄에 헤진 옷들이 걸려있는 풍경에서 느껴지는 삶의 진솔함, 터널 길에서 음악을 들으면 야마하 스피커 못 지 않는 성능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체험을 통해 알게 된 짜릿한 행복감, 시골길에는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름 모를 화려한 꽃 한 송이가 풍기는 승리자 포스를 지닌 자존적 고고함 그리고 해 저문 하늘에 몰려있는 저 장엄한 구름 떼들이 주는 삶의 엄숙함...

우리는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길을 걷고 있지만 도중에 문득 발견하는 찰나의 감동을 위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긴 여정의 인생길을 걷다 나도 모르게 마주하는 나만의 길을 우연히 만날 때의 감동, 그것은 이 여행길에서 마주했던 찰나적 순간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찰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지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찰나가 전해주는 인생의 깨달음이란 실로 걷지 않는 자는 느껴볼 수 없는 그런 특별함의 희열이다. 삶을 살지 않는 자는 그런 찰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느 순간에 올지 모르는 삶의 찰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를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여행길은 삶이란 살아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걷다보면 마주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여행에서 얻어진 참 의미이듯 살아간다는 것 그 차체만으로 삶은 그 의미와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삶은 사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거창하게 계획할 것도 거창하게 내세울 것도 아니다. 여행길을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과정이 삶인 것이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의 풍경을 즐기며 그냥 걸어가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나는 그렇게 남편의 등을 보며 때론 그의 손을 잡고 의지하며 그와 나란히 발을 맞추며 걸었다. 그와 함께 걷는 순간이 내 삶의 의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늘처럼, 20여년의 세월을 발의 통증과 뜨거운 태양을 뒤로하고 물소리 길의 영화 속 배경 같은 풍경을 온몸으로 한 가득 느끼며 먼저 앞장선 철수의 등을 보며 따라왔다. 여행길에서처럼 묵묵히 자신의 짊을 짊어지고 가는 남편의 등을 보고 따라 걸으며 그동안 나는 참 행복하고 따뜻한 인생을 살아 왔다는 무한 긍정의 생각과 감사하는 마음이 새 록 거렸다. 내가 남편의 등을 보며 묵묵히 따라 걷듯 그도 내 어깨에 잠시 기대어 쉴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고 인생이었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 좋은 인생이다. 앞으로 걷는 우리의 길이 가을빛 위에 놓여 있는 물소리길 동네의 길목처럼 더욱 소담스럽고 정다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Spirit Of Spring (봄의 정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